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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신년 뽑기 운세

원탁의 기사 등장

  새해가 지났다.  1월 1일의 삶이 작년 12월 31일의 삶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들뜬 마음을 제외하면 어떤 마음의 변화도 없었다. 이젠 앞에 '4'자가 붙었지만 이역시 '우리가 벌써?'라며 와이프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 이 역시 큰 새로움은 아니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며 준비된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건조한 인식으로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그동안도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아왔고 해가 바뀌어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고 쉽사리 삶이 바뀔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먹거리 장을 보고, 잔을 부딪혔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신년 첫날의 계획은 신께 감사하는 예배를 올려드리고, 처가댁에 방문하여 새해 인사를 드리고 떡국을 얻어먹는 일이었다. 오늘은 느긋하게 일어난 뒤 12시 예배로 향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건 아니지만 송구영신 예배 때나 신년 예배 때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을 뽑는 '말씀 뽑기'를 하는 교회도 있다. 오늘 예배도 이 순서가 계획되어 있음을 순서지를 통해 확인했다. 말씀 뽑기 순서를 확인한 나는 이건 마치 한 해의 운세를 뽑는 것 같은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며 이런 순서는 별로 좋지 않다는 소회를 얘기했지만 아내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 혼자 뭔가를 아는 척 떠벌렸지만 모든 사람 손에 들려있는 귀엽고 작은 봉투 속의 '말씀 점꾀'를 빨리 꺼내보고 싶어 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러했다. 조금 후 인도자의 안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뽑기가 끝나고 난 후 본인 손에 들려있는 그 작은 봉투를 동시에 꺼내보았다.


  '뽑기 행사'(이것도 폄훼의 표현)에 대한 혹평을 내어 놓은 내가 그 뽑기 종이 한 장을 꺼내 집어 들고는 한참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내에게 들킬까 싶어 눈을 돌려 아내의 뽑기를 살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정면을 주시한 채 그 뽑기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음미하듯 행동을 취했다.


  신랄한 혹평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라..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만 주고, 운세가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 기대와 맞으면 신줏단지, 기대와 다르면 연말이 되면 찾지도 못할 종이 쪼가리가 되는 그 점꾀 종이를 보고 눈물이 흘렀다.


  거기에는 올해 취업할 거라는 얘기도 없었고, 큰 재물을 얻게 된다는 얘기도 없었다. 귀인을 만난다는 얘기도 없었고, 몸이라도 건강하리라는 얘기도 없었다. 말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네가 어딜 가든 널 지키겠다'


  안 풀리는 인생으로 인해 하늘을 향해 욕하고, 일상에 불만만 가득하던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토닥여주다니.. 이제 더 이상 뽑기나 운세가 아닌 내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느낌이었다. 아내도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꼭 아는듯한 위로의 말씀이었다고 전했다.


  물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뽑은 그 종이 위에 저주의 글이 쓰여있을 리는 만무하다. 다 좋은 얘기로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듯한 말이 쓰여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받았다는 점과 나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든든한 원탁의 기사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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