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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놀면 뭐해? 뭐라도 해야지?(스스로에게)

택배 소일거리의 시작

  택배 일을 시작했다. 


  사회복지사로 10년 조금 넘게 일하며 그 현장이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였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따라서 안전하게 느껴지는 그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봤으며, 그 세상 밖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 세상 밖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었으며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으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울타리 안의 사회복지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었다.


  정규직은 아니다. 요즘 정식 택배기사가 아니더라도 자기 차량으로 소소하게 택배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다.(꾀나 신기한 일) 소비자가 느끼는 안정감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매뉴얼을 잘 읽고 하면 나름 정식 기사인 듯한 기분도 든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했다. 동생이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데 형의 구직기간 소일거리로 해볼 만하다고 추천했다. 말 그대로 소소한 용돈벌이이다. 6개월째(이제 6개월이구나..) 놀고 있는 내가 조금이라도 면을 세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보였다.


  그동안 백수생활을 나름 합리하기 위해 몇 가지 노력했던 작업이 있다. 역사에 쪼금 관심 있다는 이유로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며 관련된 인강과 드라마를 섭렵하며 역사관을 조금씩 갖추어 나가려는 노력을 했다. 또 하나 쉬는 동안 머릿속에 뭐 좀 집어넣자는 생각에서 일본어를 공부한다고 이 역시 유튜브 동영상으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외우고 단어를 외웠다. 그리도 읽고 싶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보자, 그리고 지금의 백수생활을 하루하루 기록해보자는 '일기'로 시작했지만 지금 보면 일기보다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찌끄리는 감상문 따위를 쓰고 있다는 마지막 명분으로 백수생활 합리화의 화룡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런 합리화의 작업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유는 '돈'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닌 줄 알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는 아니었다. 아내의 월급으로 생계를 꾸린다는 아무래도 마음이 무겁고 어려웠다. 다른 걸 통해 열심히 살고 있으며 제2의 도약의 준비하는 과정처럼 보이도록 설정했지만 이건 위장이었다. 결국 면접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슬픔과 이제 어느 곳에 이력서를 넣어야 하는지 모를 암울함이 나를 짓누르며 아내의 위안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내 소화장애는 그래서 생겨났다. 요즘은 머리털도 빠진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머리털 하나는 내 신체 자랑 1순위로 꼽혔었다.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 내 머리털이 검고 두꺼워 학우들과 머리털 1개를 뽑아 자기 머리카락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서로의 머리카락을 X자로 밀어붙이며 먼저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게임에서 항상 우승자는 나였다. 친구들이 돼지털이라고 놀리기도 했을 정도로 유난히 검고 두꺼웠다.(왜 돼지털이라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친구들의 야비하게 두 개를 겹쳐 도전해온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두께가 답은 아니었다. 내 머리털의 강도 또한 최상급이었음을 기억한다. 머리털 자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겠다. 남자는 머리빨, 안경빨이라는 말이 있다. 이 두 가지 조합이 완성형 얼굴을 만드는지는 스스로 말할 수 없겠다.(민망해서) 하지만 머리빨 만은 아주 높이 평가한다. 머리는 자연스러운 헤어 스타일링이 가능할 정도의 '반곱슬'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웨이브 지지도 않고 어찌 보면 직모처럼 보이지만 손으로 넘기는 대로 모양이 잡히는 마법의 머리카락이다.(본질에서 벗어난 것 같아 머리털 자랑은 여기까지)


  이런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화장실 바닥으로부터 전해졌다. 그 바닥이란 작자는 내 머리카락을 한 톨 한 톨 모아 뭉치로 만드는 묘한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난 뭉탱이 머리카락을 한 번에 쥐어 올리며 탈모가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아니 아직 속단을 이르다. 예전 직장생활을 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증상이었다.


  결국 결혼과 동시에 백수가 된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내에게 그럴듯한 가능성과 믿음을 주려 했지만 통장의 잔고가 보충되지 않는 한 아내를 안심시킬 수는 없었다.(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배일을 하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택배 정식 기사가 아닌 택배 아르바이트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사 분야 중 '재가복지'의 분야가 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렵게 사는 이웃들을 만나고 돕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해서 다른 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주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택배는 이것과 사뭇 내용이 다르다. 하루에 수십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난 다기보다 집을 만난다고 해야 할까? 배달에 앞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대기'이다. 택배 물품을 차량에 실어야 배달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지만 많은 양의 물량이 지역별로 소분되기까지 시간이 거리며, 그나마 간선차량(큰 트레일러) 이 빨리 들어와야 소분도 시작되고 배달도 빠르게 진행된다. 하지만 택배 물량을 받기 위해 평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대기를 한다. 늦으면 늦는 대로 시간 맞춰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나마 대기하는 것도 감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하루하루 신청하는 택배 소일거리는 매일이 면접의 연속이다. 떨어지면 차량 대기가 아닌 그냥 집에서 푹 쉬어야 한다.(그날의 벌이는 없는 거다)


  택배를 신청하는 사람의 수는 지역별로 다르겠지만 내가 사는 직역에 있는 택배회사는 새벽 배송 50명, 주간 배송 150명 정도를 자랑한다. 이렇게 자리가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도 떨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떨어지면 그날 사정이 있어 못 나오는 사람의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때문에 추가 물량 대기자가 리스트가 있는 것이다.


  택배 담당자가 이 많은 인원(알바인)을 상대할 수 없으니 단톡 방을 만들어 서로 돕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었다. 그 안에서 모든 정보가 공유된다. 업무방이 있는가 하면 잡담 방도 있다. 그곳에서는 사는 얘기, 서로를 격려하는 따뜻한 얘기가 오가기도 한다. 이곳의 글들을 눈팅하며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목도한다.

  


  내가 처음 했던 알바는 새벽 배송이다. 모두가 자고 있는 시간 2시-6시까지 난 자연스레 물류창고로 차를 이동시킨다. 그곳에는 시간 맞춰 온 많은 이들이 추운 날씨에 차량 속에 라이트를 끈 채 대기하고 있다. 먼저 온 순으로 물량을 주기 때문에 빨리 갈수록 빨리 나간다. 난 빨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십 수명이 먼저와 있음을 확인한다. 이들이 왜 이 시간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궁금해진다. '나처럼 백수인가?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한 투잡인가?' 이들은 어떤 생활을 하기에 이 시간에 나와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지가 매우 궁금해진다.


  잠자는 시간이 뒤엉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주간 배송을 시작했다. 새벽에 눈떠있는 게 편하지만 사람들이 출근하는 아침 7시까지 배송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상대적으로 압박감이 덜한 주간 배송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 상황은 새벽보다 더 하다. 이 일이 전업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사람들의 차량 약 150대 이상이 이곳에 모여든다. 대기시간은 새벽과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어찌 되었건 2시간을 대기하여 오늘의 할당량 80건을 받아 들고 낯선 배 달지로 떠났다. 그곳은 다름 아닌 부촌 잠실의 어느 타워팰리스.


  과외를 하며 시간적 여유가 있는 친구 녀석이 돕겠다고 하여 함께 갔다. 친구가 검색해본 바로는 이 아파트의 시가 15억~20억을 호가한단다. 50층이 넘는 고층에 아파트 1층 로비는 호텔을 방불케 한다. 아니 그냥 호텔 로비라고 해도 믿겠다. 이곳 1층에는 세미나실과 다양한 대여 하여 쓸 수 있는 특별한 실들이 겸비되어 있었다. 데스크의 경비들은 젊은 경찰관처럼 보였고 매일 오는 택배기사 일진 데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듯했다. 층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는 카드키를 통해 입장이 가능하며, 엘리베이터 4기가 50층 이상을 초고속으로 오르내리며 주민이 기다리는 시간을 여느 아파트에 비해 월등히 단축시켜주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여유와 교양이 넘쳐 보이고, 승강기 내에서 한 중년 남성의 얘기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여유 있게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걸 보아 회사 간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아저씨는 골프채 세트를 세운체 자신의 집으로 올라간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게 탄 걸로 보아 동남아 골프여행을 갔다 지금 돌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승강기에서의 엄마와 딸은 장을 보러 가는지 싸우나를 가는지 정겹게 얘기하며 내려가고, 이때 난 검은 패딩과 모자를 눌러쓴 채 카트에 쌓인 짐과 한 몸으로 승강기에 타고 내린다. 이런 나를 위해 승강기를 잡아주고 짐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조차도 이 아파트 주민들 전체가 교양이 넘쳐흘러내리는 장면이 되고 만다. 한 할아버지는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은 어린 손자에게 자기 배가 더부룩하다는 얘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이 먹은 점심은 고급 한정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아파트로 들어가는 초등학생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라고 생각하며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의 브랜드를 확인한다. 어떤 인형 같은 게 달려있었지만 무슨 브랜드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회복지사로 어렵게 사는 허름하고 낡은 집을 주로 다녔던 나에게 오늘의 배정지는 아주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뭔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걱정이라는 게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괜한 열등감이 폭발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괜한 오기도 생겨 머지않아 나도 이런 곳에서 살아보겠다는 의지도 다지게 된다. 괜한 삐딱이가 또 발발하여 한국의 빈익빈 부익부, 빈곤의 되물림을 생각하다 가고자 하는 동호수를 잊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제 나와는 다른 삶을 살 것 같은 이들을 떠나 현실로 돌아왔다. 8시가 넘은 시간, 아내는 택배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을 보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방긋 웃어주리라 생각했지만 아내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소파 끝에 머리를 기대어 누워 핸드폰보다 나를 쳐다본다. 씻는 동안 아내는 부대찌개를 만들어 예쁜 국그릇에 담고 몇 가지 찬도 작은 찬그릇에 담아 아담한 식탁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다. 내가 택배를 통해 적은 돈이라도 벌어오는 게 좋은지 아닌지가 벌써 표정으로 보인 터라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가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이력서는 언제 쓸 거야?' 난 한 자 한 자 목소리에 힘주어 대답했다. '걱정 마. 나 주업으로 택배일 할 생각 없어. 이력서는 쓸만한 회사가 나올 때마다 계속 쓰고 있고, 취업이 되기 전까지만 할 거야.' 왠지 대답이 너무 길었다. 나도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아내는 그 작은 돈벌이보다 빨리 안정적으로 취업하길 소망했다. 아내의 소망은 내 소망과도 같았지만 쉽사리 선택받지 못하는 취준생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내 대답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내일도 낯선 곳으로 택배 배달을 하게 됐다. 합격 문자를 받았다. 사회복지사로 선택받지 못하는 내가 이곳에서는 연이어 선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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