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실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영 Jan 13. 2019

거부당하는 기분은 너무 시로시로

오기 충전

  어떻게 모든 것에서 떨어질 수 있지? 어떻게 하는 것 족족 잘 안될 수가 있지? 세상에서 나의 한조각도 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무너져 내리는 이 기분은 뭐지? 세상의 어느 하나라도 나를 수용해줄 수 있다면 존재의 이유를 찾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10평 남짓한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미세먼지 상황을 체크하는 나로서는 밖을 나가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고, 나간다 하더라도 별다른 할 일이 없다.


   그렇게 방구석에 박혀 생활한 지가 벌써 120일이 되었다. 때로 약속이 잡히기도 하지만 120일 중 손에 꼽을 정도니 바깥 생활과 담을 쌓고 살고 있는 것이다. 실직 초창기 아내 출근길을 따라서 지하철역까지만 함께 따라나간 적이 있다. 신혼의 애틋함이 었으리라. 둘이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역까지 걸어가며 아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극을 받는 것 같아. 사람들은 아침일찍부터 준비해서 나오기까지 참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자극이 돼. 열심히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 열심히 살겠지만 저 개인의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찌 됐든 무너져 내리는 건 숨길 수 없다. 


  난 포인트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맞추려 하지 않고 내 사상과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실행해 나간다. 이것이 나를 고립시키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어딘가가 나를 거부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어쩔 때는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난 창조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 무가치한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소비하는 존재가 아닌 생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제도나 문물, 물질뿐 아니라 생각도 말이다. 최근에는 다른 트렌드가 있는 듯하다. 모방은 창조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던가. 그간 세상에 나온 것들을 조합해서 새롭게 만드는 일 또한 창조다. 여기서 언급한 어느 방법이 되었건 간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로 난 창조를 하고 싶다. 


  또 하나 아내에게 얘기한 중에 무구한 역사 속에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먼지 같은 인생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럴듯한 명분이 있으면 목숨을 내놓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고 할 수 있다 못한다를 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꾸준히 한다면 머리에 세뇌되어 결국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떤 명분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어떤 이가 그랬다. 좋은 놈 나쁜 놈들이 말하는 자신만의 논리가 결국 명분이라면  명분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고 명분은 단지 개인의 이기심을 채워줄 논리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가 한 말보다 쉽게 말했다. 다시 말해 명분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쳐 죽일 이완용은 친일행각을 벌였던 나름의 명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군대에서 천황을 위해 조국에 총부리를 겨냥했던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생명을 건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어쩌면 랜덤 하게 역사에 그럴듯한 인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확실한 명분. 그것은 신의 존재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종교성이 있다고 말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를 보면 토테미즘 샤이니즘이 뭔가 일월성신을 섬기고 제단을 쌓는 것은 누가 알려줬는가? 하늘에서 계시를 내려 그 방법을 알려줬는지는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논리 적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두려운 존재, 의미 있는 존재를 찾아 마음을 내어준 것이다. 종교성에 올인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명분에 올인하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테이프를 맨 앞으로 감아보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 바로 허무성이다. 인생은 짧고 무구한 역사 속에 점으로 남는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은 미물보다 못한 먼지다. 100년 인생에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도 어쩌면 의미 없는 짓거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손을 낳고 번성하려는 본능, 그리고 자식이 잘되도록 물질적, 사상적 유산까지도 아낌없이 주려 하는 것은 나를 닮은 어떤 존재가 나를 대신해 영속해달라는 기원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짧디 짧은 인간의 삶 속에서 허무함을 극복하며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점을 선으로 만들려는 태도가 바로 창조성인 것이다.


  인간은 신이 거둬들이기 전에 갈대숲에 버려진 핏덩이였다. 하지만 어떤 긍휼 한 손길이 그 핏덩이를 보고 가엽이 여겨 거둬들인 것이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이미 허무한 인생인데 4개월 놀고 있는 백수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의미를 짜내 보려는 시도가 아무것도 먹히지 않는 것이 너무나 씁쓸한 것은 내가 아직 생명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의미를 짜내 보려는 시도는 브런치 작가 신청이었다. 너도나도 쓰는 것 같은데 난 왜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가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려다가 너무 멀리 돌아왔다.


 "계속 써 내려가겠다. 창조의 혼이 머질 때까지" 


  그러니 날 들여보내 달라. 내가 껴안고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릴 문자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이 글은 창조가 되어야 하고 생령이 되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믿는 신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