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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실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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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직장인의 로망을 꿈꾼다.

있어있어 분명히 있어.

  꿈을 꿨다. 이전 직장, 다시 말해 4개월 전에 다니고 있던 직장에 방문? 하는 꿈이다. 유쾌한 꿈이 아니었다. 아니 악몽이었다. 긴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팩트가 강력했다. 꿈은 즉슨 사무실을 들어가니 관장과 과장은 둘이 한쪽 귀퉁이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은 자기 자리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10명이 조금 넘는 직원들 중 나를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절저하게 외면당했다. 더 이상의 전개는 없었지만 현실세계로 돌아와 기분이 나쁜 것은 의문에 1패였다.


  내가 잘 일하고 있던 직장을 그만둔 것에 대하여 가족과 지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어느 직장이나 그런 상사는 있고, 불편한 관계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그 사람이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상한 끝을 보여주는 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말은 요즘 말로 번역하면 존버 하면 볕 들 날 온다는 것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칼을 가는 것보다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역습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선택했다. 인격적인 대우가 없는 직장에서 1도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곳의 우두머리는 히스테리 성향에 성과중심 사고가 쩌들어 있는 인간이다. 직원들을 일적인 도구로 삼는다. 그러니 인격적인 모욕감을 주어서라도 성과만 확실히 내면 그만이다.


  어느 회사나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 인간을 도구로 부릴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것은 그런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사직서를 그 면상에 던질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고이 접어놓은 사직서를 가슴속에서 꺼낼 수는 있겠다. 펼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과감히 던질 수 있을까? 면상이 아니라 상사의 책상 앞에 고스란히 올려놓으려고 한대도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장면 장면 좌우 슬라이드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는 감행할 수 없다는 비참함에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다시 업무를 시작한다. 많은 직장인이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 것을 알지만 실행할 수 없다는 변명의 뻔한 레퍼토리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말할지라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나타내려면 실행하지 못하는 직장인의 비참한 모습을 최대로 부각해야 한다.


  한동안 아내의 노동 과실(열매)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미안한 마음 가득하지만 나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난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고, 직장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으며 개선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개선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를 우리 팀 안에서부터 해결해보고자 노력했다. 상당수 변화가 있었지만 상사의 부담함을 까발린 죗값은 고스란히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비겁하게 내가 아닌 동료들을 힘들게 했다. 어느새 내 존재가 팀원들에게는 부담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상황 파악은 금방 이뤄졌다. 회사의 장이라는 인간은 나와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반대되는 행동을 노골적으로 했다. 나는 말보다 행동을 믿는 사람이라 이중 메시지 임을 육감적으로 눈치챈 후 거취를 결정했다.


  내 거취는 오직 한 사람의 허락만을 필요로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삼고초려였던 것 같다. 첫 번째 사직의 변을 늘어놓을 당시 아내는 눈물로 대답했다. 두 번째 시도는 눈물은 아니었지만 깊은 한숨으로 내 주위 산소를 모두 빼앗아갔다. 하지만 마지막은 달랐다. 아내는 이미 초연했고, 신앙의 힘 내지는 산입에 거미줄 치랴는 마음으로 수용의견을 밝혔다. 한 가지 더 인가의 이유가 있다면 퇴사와 관련하여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어찌 되었건 난 직장을 그만두었다.


  전체 송별회도 마다했다. 상사와 껄끄러운 자리가 될 것 같았다. 과에서 조촐한 송별회를 준비했고 그곳에서 술 취한 직원에게 앞으로 내 목표가 될 얘기를 들었다. 그냥 술자리에서 흘려들을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나에게는 분명 취중진담이었다.


  "과장님이 사장이 되는 곳으로 가서 함께 일하고 싶어요."


   떠나는 직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더 이상의 송별사는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시로부터 난 계속해서 생각했다. 내가 사장이 되어 보여주겠다. 어떻게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높은 성과를 이뤄나갈 수 있는지를 말이다. 4개월 동안 나를 채찍질하며 고여있는 머리에 새로운 사고를 얹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이고 와신상담의 노력이었다. 복수의 대상은 전 직장의 우두머리와 그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모든 나쁜 인간들이다.


 하지만 드는 생각은 또 있다. 복수의 마음으로 꿈을 실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것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나의 이력에 흠집을 냈으며, 자존감에도 손상이 갔다. 10년 넘는 경력을 가지고 회사 밖으로 나와보니 나와 비슷한 경력과 경험의 사람이 많이 있는 듯 보였다. 우리는 다시 경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자리도 없을뿐더러 경력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반기지 않는 연차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초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복수의 칼날은 뒤로 물리고 피 튀기는 정면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어찌 되었건 서류면접을 통과하고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는 면접의 시간이 오게 되면 어김없이 받는 질문이 나를 더 화나게 한다. 


  "이전 직장에서는 왜 그리 빨리 그만두셨나요?" 솔직하게 대답하면 내부고발자가 되었고, 대충 둘러대면 스스로 가책에 시달리게 했다. 물론 대부분 솔직하게 답변했다. 여전히 난 미취업 상태이다.


  지금까지 6,7번의 면접을 봤지만 한 곳을 제외하고 모든 곳에서 같은 질문이 들어왔다. 그것도 대부분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으로 말이다. 건너 건너 쉽게 알 수 있는 비좁은 지역사회에서 같은 직종의 일을 찾아야 하는 불리함 속에서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가 직면했던 면접의 오류를 말하자면 보통 나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전 직장의 중간관리자나 회사의 장에게 전화하여 직원을 평판을 묻는다는 것이다. 전 직장의 장은 나에 대해 나름의 분명한 평가를 전달할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 나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면접 자리에서 높으신 양반이 이전 직장에 연락하여 묻지도 않은 내 퇴직사유를 먼저 브리핑해 준 곳도 있었다. 


  나를 제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리더에게 묻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인가? 그때마다 떠올린다. 내가 사장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 말. 그가 나를 대변해 줄리는 만무하다.


  언제쯤 일터로 나갈 수 있을까? 집 창문으로 보이는 출근길과 퇴근길의 도로 상황에 내가 언제쯤 합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누워 곰쓸개에 혀를 대어 맛본다. 저 도로에 오가는 직장인들의 마음은 어떨까? 즐거울까? 물론 주위 친구들과 지인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어느 하나 만만한 곳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인간적으로 대우받고 즐겁게 일할만한 곳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확신한다. 설령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을까? 걱정은 거둬라. 내가 만들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충고, 조언했던 많은 이들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버티는 것이 이기는 거다, 참다 보면 좋은 날 온다. 비굴하고 비참한 건 잠깐이다. 그들도 자신의 경험치의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난 아직도 내 선택에 따른 희망과 가능성을 보며, 직장인의 로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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