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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거절의 아픔

사실은 담담하려 노력

  거절을 당하면 아프다. 나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욕하는 것도 아닌데 이리 아프고 쓰리다. 오늘 맛본 거절 감은 일부지만 역시나 나를 힘들게 한다. 웃어 넘기 지도 울어 넘기 지도 못하는 몹쓸 감정이다. 평생에 걸쳐 거절감이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을 당위로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정답이다.


  백수 126일째, 꾸준히 넣고 있는 이력서는 1차 서류면접은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다. 자신이 있다기보다 평균치는 경력과 경험이 서류 안에 녹아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부분 이 예상이 적중한다. 나쁜지 않은 기분이다. 내가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사고를 하는 사람의 통계치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변수가 존재한다.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왼쪽 상단에 붙여놓은 사진이 맘에 들지 않다거나 경력에 눈이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류면접에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문자나 전화를 받게 되면 괜스레 가슴이 아리다. 이것이 다시금 분발할 수 있는 동력으로 전환되면 좋겠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말수가 줄고 어딘가에 의무적으로 집중한다. 그게 책이 되었건 위닝일레븐 축구 게임이 되었건 말이다.


  나를 원하지 않는 곳엔 내가 마음 둘이 유가 없다. 빨리 털어내야 한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그럴 수 없게 한다. 가부장적인 생가인지 몰라도 아내가 벌어 먹이고 재우는 게 왠지 모르게 씁쓸하고 창피하다. 


  이력서는 내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지와 소망의 피력이다. 이를 보고 합격통보가 온다면 수용 감으로 기쁠 터이고 불합격 통보라면 거절감으로 아쉬움과 비참함일 것이다. 오늘의 거절감에 방어기제가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나를 안 뽑으면 너네가 손해지' 나 말고도 일 잘하고 좋은 사람이 세상에 널렸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위안하고 눈물을 닦아준다. 스스로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다. 얼마 전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고 아내가 카톡으로 보내줬던 말도 지금 내가 혼자 위안 삼고자 했던 말과 동일하지만 설령 아내라도 다른 이가 해주는 위로는 더한 비참함을 갖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 하는 말은 감내할 수 있다.


  거절 감은 살면서 수시로 다가온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먼 사람까지 나에게 거절감을 행사하는 사람은 여럿이다. 이번 주 친구들이 모여 운동장을 빌려 축구시합을 하려고 하는데 인원이 모자라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의향을 묻는다. 대답은 가지가지가 "얼마 전 애기가 태어나서 나갈 수 없어. ", "진급시험 준비 때문에 갈 수가 없어.", "출장으로 지방에 와있어." 충분히 설명이 되는 거절감이지만 축구를 하고 싶은 나의 간절함 때문인지 수화기를 고이 보내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 주, 그다음 주를 기약한다. 내 마음이 간절할수록 거절감의 고통은 심화된다. 하지만 이것은 얕은 예에 불과하다. 


  결혼을 위해 청첩장을 돌려야 하는 때를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기쁜 행사를 위해 초대하는 작업은 기쁘기도 하면서 부담되기도 한다. 나를 축복해줄 수 있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기쁨으로 줄 수 있지만 평소에 연락이 없지만 그래도 알려야 할 거 같아서 연락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답변을 들을 수도 있다. 거절감이 바로 그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더라도 당연한 이치다. 평소 연락도 왕래도 없던 사이의 사람이 청접창을 보내며 축하를 바란다는 것은 꼭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는 이기심을 욕하기도 하지만 한 명이라도 초대하여 풍성한 결혼을 경험하고 싶은 신랑 신부의 애절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듯하다.


  나도 리스트를 마련하며 몇 번을 동그라미를 지웠다 그렸다를 반복했던 경험이 있다. 그럴 바에는 부르지 않는 편이 낫다. 그걸 알면서도 분명 나중에 서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창 관계가 있던 시절, 아니 나와의 관계가 끊어질 무렵의 인사가 분명 "결혼할 때 꼭 연락해" "열일 제쳐두고 갈게"라는 다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이라도 진실로 믿고 싶어 연락을 한다. "그날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열일 다 제쳐두고 오겠다는 약속은 벌써 뒷전이 된 약속이다. 계좌번호를 보내라는 친구들에게 쿨한 척 "아니야 맘으로 축하해줘"라고 말하며 끊을 채비를 한다. 그들은 끈질기게 계좌번호를 묻는다. 나를 그럴듯하게 설득하는 사람에게만 계좌번호를 준다. 일종의 갑질이다.


  더 희한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히 가야지'라고 말했던 사람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뒤늦게 발견한 놀라움과 서운함. 거절을 하지 못하는 연악한 인간의 표상처럼 느껴졌다. 이렇듯 거절감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 이것이 당연지사 인간의 삶이다.


  그러면 거절감의 강도를 최소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스갯소리로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오늘 같은 서류면접 결과에도 스스로 생각한다. '안될 수도 있지', '쉽게 되겠어?' 그러고는 컴퓨터를 켜서 지금과 같이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쓴다거나 위닝일레븐 축구게임을 한다. 하지만 이것도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면 글을 쓰다가도 멈칫멈칫하게 된다. 


  거절 감은 아픔이다. 연인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남자가 여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자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낸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기 때문에 메시지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보낸 카톡에 붙어있는  '1'이 없어지지 않고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 붙어있다고 해보자. 그녀는 나를 철저하게 거절한 것이다. 어떤 몹쓸 짓을 했기에 이리 모질게 외면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의 자책과 비참함은 하늘을 찌른다. 내가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내 사례는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각본을 써본 거다. 거절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심장의 단련이다. 다시 말해 강심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쨉과 원투 펀치를 맞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넉 다운된다. 내성을 길러라. 거절 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세상에 회사가 거기밖에 없냐고. 그녀가 아니면 여자가 없냐고. 자기 방어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수술하기도 하는데 스스로 지키는 것이 뭐가 어떤가? 스스로 다짐하고 지키자. 한때 서점에 '괜찮아'가 책 제목으로 유행한 적이 있다. 철 지난 유행이지만 나도 한번 써보자.


  '거절해도 괜찮아'


하나 첨가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의 '사족'처럼 말이다. 거절의 스킬도 인간관계의 기술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거절할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강렬하게 거절을 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말이다. 거절의 아픔을 아는 나는 텔레마케터의 관심 없는 용건 전화에도 무자비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꼭 한마디를 붙인다. "죄송하지만 지금 조금 바빠서요." 거절은 거절이지만 죄송함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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