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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디스랩 배틀

회피하면 지는 거다.

  저질스런 19금, 더러운 욕설, 비하, 무시가 합법적으로 음악 속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심심할 때마다 유튜브 영상을 본다. 상위에 링크되어 있는 산이의 영상이 궁금해 들어가 봤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여성 관객과의 노골적인 싸움 영상이다. 누가 먼저랄 것이 없다. 영상 속에서는 산이를 싫어하는 여성 관객들이었지만 이 둘의 싸움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마치 불구경하듯 영상들을 뒤져본다.


  산이는 꽤 많은 수의 관객들의 모욕적인 언행에 대해 이들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며 일부 남혐 사이트를 언급하며 너희들은 틀렸다고 말한다. 이 싸움은 꽤나 흥미진진하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아티스트가 다수의 여성팬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어떻게 대처할까 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도 자신의 소신대로 음악을 무기로 사용하며 대항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느껴지기도 하다. 이 영상을 옆으로는 '디스랩'이라는 영상들이 오른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다. 나의 클릭을 기다리는 녀석들이다. 모두 만나봐야 했다.


  래퍼들이 말을 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어학 박사는 아니더라도 최소 석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언어학이 래퍼들의 작문실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글 짓는 솜씨가 그 정도는 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글을 쓰는 사람도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며 많은 단어 중에서 이 문장에 들어갈 단어는 무엇인지 사전을 펼쳐 유의어를 찾아본다. 래퍼들은 라임을 맞추고 박자를 타면서 마치 '시'의 행과 열에 들어가는 순서를 맞추는 듯 언어를 조합, 배합한다. 그러니 랩을 좀 한다는 래퍼들은 '언어의 마술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노는 래퍼들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이 하는 랩 속에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주제가 들어가 있다. 사회비판이 있을 수 있고, 순수하게 힙합정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우월함과 성공을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눈여겨본 것은 '디스랩'이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랩을 하는 아티스트들의 영상을 순차적으로 시청한다. 그러니 '산이'라는 래퍼와 관객과의 싸움 또한 어떻게 언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지.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는지가 관람 포인트다. 


  영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 영상이 마칠 무렵 다음 영상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래퍼들의 싸움이 높은 조회수를 이미 보유하며 나에게 손짓한다. 이 '언어의 마술사', '언어를 가지고 노는 자'들의 싸움은 가히 볼만한다. 주먹만 안 썼지 그 언어 하나하나가 상대방의 심장을 겨냥한다.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별로 우회하지 않는다. 바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린다. 100분 토론과 같이 들어올 때 나갈 때 악수하며  중간에 난장토론을 벌이는 형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토론은 룰이 있다. 토론 주제에 집중해서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 하지만 '디스랩 배틀'은 상대방을 깔아뭉갤 논리만 있으면 된다. 영상은 대중들에게 공개되고 대중들은 심판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맞대응을 위한 '디스랩'을 올리지 않는다면 기권패로 간주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의 논리는 이곳에서 별로 성립하지 않는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몰입도 최상으로 시청한 후 내 마음은 '쿵쿵, 쿵쿵' 뛴다. 그리고 한편으론 후련함을 느낀다. 치고받는 장면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하다. 한쪽 래퍼의 디스곡을 듣고 상대방이 이제 일어날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맞대응 디스곡을 들어보니 상대방이 했던 말들 하나하나를 모두 받아친다. 받아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결정적인 카운터 펀지를 날린다. 실제 싸움이었으면 둘 다 만신창이로 링을 내려와야겠지만 실제로 그런 마음일지는 당사자가 돼보지 않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언어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것. 별다른 룰이 없어 어떤 말을 해도 좋다는 프리 한 규정 속에서 말로 싸운다면 그 속에 논리가 있을 수 있을까? 그냥 상대방보다 심한 단어와 욕설을 쓰는 것이 논리를 뛰어넘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나도 마음속에 울분이 쌓여 있었나 보다. 결국 내 선택이었지만 나를 퇴직하게 한 직장상사. 계속해서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울분을 대신 토해낼 창구가 필요했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이들이 했던 '디스랩'을 따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나름 규정이 프리 한 이 세계에서도 '대나무 숲' 같은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얘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게 면전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물론 내가 내뱉은 '가공할만한 랩'을 듣고 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내 랩을 씹어먹을 랩'으로 내 심장을 내리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길 확률을 좀 더 따져보고 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저런 싸움을 누가 해? 래퍼들이나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거지 누가 저렇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겠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랩들의 가사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무시당하고 억울한 감정에 대한 토로이자 날카로운 반격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쪼개고 붙여' 준비된 싸움을 할 사람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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