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실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영 Jan 13. 2019

신앙의 숭고함은 어디 있는가?

기복신앙

  연약한 인간이다. 정말 말 안 듣는 다섯 살짜리 꼬마애와 다름없다고 느낀다.(오히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더 낫다.) 페이스북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글이 있으면 얼른 '좋아요'를 누르고, 이것이 마치 나의 사상이라도 되는 양 자신 있게 설파했던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은 스스로도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을 또 한 번 확인했다.


  기복신앙은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난 모든 신앙인들이 기복신앙을 갖고 있지 않기를 너무도 바랐다. 신앙의 본질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한다고 하면 돌, 나무, 생수를 떠놓고 자신과 가족의 무사안일, 자식의 수능 대박을 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내가 믿는 종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교들과 다른 신앙적 숭고함이 있어야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예수를 믿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 중 내 마음에 쏙 드는 숭고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희생'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세상에 보낸 반신반인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네 못 박힌다. 이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마음 너무 아프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인간도 내가 사랑하기에 이를 감내하며 구원의 조건을 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위해 보낸 나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가 인간의 죄(개인으로 볼 땐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했다는 사실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천국을 주겠다는 조건이다. 어떻게 보면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 손쉬운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가 얼마나 숭고한가? 억 겹의 시간 속에 길어야 100년 사는 '점'과 같은 인간에게 영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사랑이다.


  하지만 아들을 믿기만 하면 영생으로 들어간다는 불변의 진리는 인간사에 찌들어 다른 것을 구하게 된다. 앞서 말한 개개인의 소망이다. 부와 명예, 건강과 길함, 인간적 영속(자식의 잘됨) 등의 소망을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나의 숭고한 종교에 이런 저속한 것들을 집어넣었는가? 중세 개인의 죄를 면해준다는 면죄부를 돈 받고 파는 행위들을 종교지도자들이 앞서 행한 것처럼 목사들이 개인의 부와 명예를 위해 숭고함을 훼손했는가? 


  우리나라가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와 차별받고 억압받고 있던 백성들에게 종교로서 해방구를 찾아주었다는 점에서 '기복신앙'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반과 상놈', '남존여비'와 같은 시대적 차별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기독교적인 교리의 시각으로 말이나 되는 일이었을까? 감사하게도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해주는 이 종교가 바로 지상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 종교는 연이어 나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만능키'로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희생을 말하는 성경과는 달리 일생을 복을 구하는 구시대적인 종교의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니, 초기 핍박받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제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신은 기도만 하면 기적과 같은 일들을 눈앞에 펼쳐진다. 모두가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경험이 간증이 되면 자신에게도 동일한 경험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은 굳건해진다. 이로서 신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은 죽은 이후의 '천국 소망'이 아니 살아서의 '복'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 묫자리가 좋아 자자손손 길한 들 살아 복을 누리지 못하면 무엇하리. 지금 용인은 살기 좋은 동네로 많은 인구유입으로 앞선 말은 '옛말'이 됐다. 종교에 빌며 살아서의 복을 구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됐지만 '숭고함 따위'를 찾는 나에게는 여전히 눈꼴사납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희생하며 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에게 기도하며 지금도 취업하지 못하는 현실로 인해 하나님 면전에서 그를 부정하기도 한다. 신과의 '결판'도 자행된다. '내가 좋은 곳에 취업하게 되면 더 잘 믿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승부를 걸어오는 나에게 별다른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면 곧바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그냥 없는 셈 치는 것이다. '난 천국은 믿어도 현세의 복은 믿지 않아.'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또 있을까? 이를 알면서도 숭고함을 지키지 못하는 버러지 만도 못한 인간이다. 그러면서 남들의 숭고하지 못함은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낸다.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기복신앙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면 생전이나 사후나 할 것 없이 복을 구하는 것은 기복이다. 사후 천국을 구하는 것은 '기복'이 아니고 생전의 복을 구하는 것은 '기복'인가? 둘 다 기복인 것 같다. 그러면 기복신앙을 욕하는 이유는 뭘까? 똑같이 복을 구하는데 현세의 복을 구하는 것은 왜 속물처럼 느껴야 하는 건가? 현세를 행복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죄'는 아닐진대 말이다. 아마도 그건 나처럼 내 욕심을 채우려 복을 구하고, 복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 협박하는 인간들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여기에 속하며 '숭고함'의 '숭'자도 꺼내면 안 되는 인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 같은 부류가 있는 반면 또 다른 인간들도 존재한다. '기복신앙'을 조장하며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자신을 신격화하여 떠받들여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라고 하는 '거짓 희망'을 주고 재물을 탐한다. 거짓된 혀놀림에 놀아난 사람들은 여전히 '헌금'을 많이 하고, '목회자'에게 절대복종하며 현세의 복을 구한다. 이들은 스스로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역시나 '숭고함'에서 멀어지게 한다.


  앞으로 종교는 어떻게 변형될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변한다는 것은 '타락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앙은 '타협'이 대상이 아니다. 나도 앞으로는 현세의 복을 받기 위해 하고 있는 일차원적인 행동들을 돌이켜보고, 타인을 위한 희생과 사랑으로 점철되는 '숭고함'을 향해 방향을 선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관심이 있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