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만 수용
대학시절 사회복지를 공부하며 어디서 인지 모르겠으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몇 가지 단계'가 있음이 생각났다. 대략 5단계이겠거니 하고 찾아보니 5단계가 맞았다. 실직 5개월 차. 일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느끼고는 실직자들이 느끼는 단계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죽음의 5단계가 떠오른 것이다. '죽음의 5단계-실직의 5단계'를 억지로 짜 맞추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죽음의 5가지의 구성이 실직의 상태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 내 감정을 들어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 맘대로 차트'인걸 어쩌겠는가?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은 '부정(Denial) - 분노(Anger) - 협상(Bargaining) - 우울(Depression) - 수용(Acceptance)'의 다섯 가지이다. 이것은 동등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적어놓은 순서대로의 감정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겪은 실직과 동시에 겪는 감정의 변화는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서와는 정 반대의 순서이다. 따라서 '수용-우울-협상-분노-부정'의 순서가 된다.
'죽음을 수용하는 것'과 '실직을 수용하게 되는 것'의 순서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뉴스에서 자주 보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의 피켓, 현수막에 쓰여있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생각나서이다. 숱하게 듣고 보았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벌써 죽음과 실직 사이에 이퀄의 등호를 넣고 있지 않는가? 어찌 보면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의 의미하지만 실직의 고통은 계속해서 죽임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중 30명이 질병, 우울, 자살로 생의 끈을 놓아버린 것을 보면 실직의 단계가 죽음의 단계와 다를 이유를 찾기 힘들다.
실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수반하기에 실직자가 떠안게 되는 무게는 배가 된다. 아니 그 무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배수가 된다. 쉽게 단언할 수는 없으나 평생직장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면, 누군가 한 번의 짧은 고통으로 숨이 끊어지게 해 준다면 그걸 선택하는 편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 찾아오지 않을까? 해고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죽임 당하는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 역시 그들이 느꼈던 고통 중 십분지 일도 느껴보지 못한 자의 설레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고가 아닌 자발적 실직의 상태는 어떤가? 그것도 죽음과 비견되어야 할 정도인가? 내 경우를 들어 말하자면 그것도 결국의 죽음의 단계를 향해간다.
난 스스로 직장을 그만뒀다. 결국은 내 선택이었다. 책임이 있으면 내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장에서 본 상황만 가지고는 순전히 나 스스로의 책임만 물을 수는 없다. 내가 나가게 될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 혼자 그만두고 나 혼자 곤경에 처한 것을 누구 탓을 하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 직장의 경우, 정규직원이 15명도 안 되는 작은 회사인데도 2년이라는 기간 동안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만뒀다고 하면 그건 정상적인 회사이고 그렇게 만든 오너는 과연 정상적인가? 해고를 살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오너는 간접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다. 그곳을 뛰쳐나간 직원들은 실직의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지 아니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지는 알 수 없고, 물론 너, 나의 이유가 섞여있을 수도 있으나 다수의 자발적 퇴직 상황만 놓고 봐선 가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남 탓하는 게 우리 정서상 좋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많은 현자들의 말에 세뇌되어 스스로에게 더 가혹한 채찍을 휘두르며 스스로에게 칼질한다. 사표를 던진 내 선택에 대한 말로라고 말이다. 물론 현자들의 말도 약간의 일리는 있다. 그만두기 전에 이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기회를 잡아 나가면 될 일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베스트의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기회를 잡은 사람들에겐 다행이자 행운인 것이고,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상황과 어려움에 공감해야 한다.
죽음의 5단계의 역순인 첫 번째 '수용'을 말하려고 하다가 서두가 길었다. 죽음의 5단계에서 '수용'은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 쇄약 해져가고 판단력은 흐려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아무리 부정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어쩌면 그건 죽음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죽음은 무섭고 싫지만 어쩔 수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일 수 있겠다. 실직의 첫 번째 단계인 '수용'은 실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불법 해고를 당해 노동청에 신고하고 피켓을 들며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 투쟁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실직의 상태를 말하고자 한다. 물론 해고의 경우라면 일반적인 실직과는 다르게 '우울'이나 '분노'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인 실직의 경우로 치자면 '수용'이 가장 먼저 온다는 것이다.(어차피 내 맘대로 차트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나의 경우 결국 내가 선택한 실직이었기에 다음 기회를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의외로 긍정정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를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행을 다닐 수도 있고, 읽지 못했던 책이며 사람들도 만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들은 길지 않아야 한다. 내 퇴직금의 범위 내에서 선택해야 하며(물론 난 9개월이라 퇴직금도 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마지막 달치 월급을 소진하기 전까지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고 산입에 거미줄 치겠냐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명언과 속담을 되뇌며 자신을 위로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한 달 내 같은 직종의 경력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며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 보인다. 한 달치의 월급으로 풀칠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행하게도 앞으로 한없이 길어질 백수의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어쨌든 '수용'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증오와 분노도 끼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와 가능성마저 엿보였다. 이러니 '수용'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때(실직한 당시) 나만 '수용'한 것은 아니다. 미리 내용증명 고지를 통해 아내의 최선의 위로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때가 바로 실직 바로 직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아내 또한 나와 같이 '수용'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코웃음 칠 것 같다.)
이처럼 실직 후 첫 번째로 찾아온 감정은 '수용'이었다. 마치 수능시험을 끝낸 고3 학생들 맹키로 시험을 잘 보던 못 보던 이 지긋지긋한 일터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수용되지 않은 곳이 있긴 하다. 부모님들이다. 친가에는 이를 알려 구구절절하게 설명했지만 처가에는 알리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때려치우고 아내를 굶기는 못난 사위는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 결정은 아내가 했다. 만일 처가에 이미 5개월째 실직상태라는 정보가 들어가게 되면 절대 수용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간의 내 취업을 위한 노력을 모두 꺼내 보여준다고 해도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장인어른은 딸을 나에게 건네주며 눈물을 흘렸던 분이다. 이처럼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 '실직'이란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이기적이지만 나만 수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