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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Apr 05. 2023

할머니와 손가락 걸고 한 약속

초등학교 고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산에 약초 캐러 간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 광산 작업복 빨래를 자청하곤 했었다. 우리 집에서 여자라고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늘 산으로 들로 약초 캐러 다니느라 바쁜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셋 뿐이었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빨래라는 생각에 함지박에 빨래를 가득 담아 용주네 집 옆에 있는 개울가 빨래터로 향했다.


내가 주로 가는 아래뜸 빨래터는 항상 텅 비어 있었다. 어쩌다 내가 혼자 한참 빨래를 하고 있으면 아랫집 아줌마가 빨래를 하러 나오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 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주 가끔은 운 좋게도 용주 엄마가 마실 나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빨래하러 왔냐고 안부를 물으셨다.


"서정이 빨래하러 왔구나!

  엄마는 어디 가셨는데 니가 빨래를 하냐?"


"엄마는 산에 가셨어요."


"그래, 빨래 잘하고 가라"


"네에"


집에서 미리 챙겨 온 따뜻한 물 한 바가지에 꽁꽁 언 손을 녹여가며 찬 개울물에 한참 빨래를 하다 보면 어디선가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원인 모를 공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 주변에 누가 있는 걸까? 혹 텔레비전에서 얘기하던 간첩이라도 나타났나? 아니면 귀신인가? 순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무서운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소설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내가 쓴 소설에 내가 덜덜 떨면서 아무리 빨아도 맑은 물이 나오지 않는 아버지의 광산 작업복을 서둘러 헹궈냈다. 그러다가 가슴에서 시작된 공포가 목덜미까지 차 오르면 얼른 빨래 함지를 들고 도망치듯 빨래터를 빠져 나와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집에 도착해서는 빨랫줄에 걸쳐 있는 바지랑대를 내려 내 키에 맞춘 후에 아직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널고 나면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새로운 궁금증이 싹트기 시작했다.


정말 이 세상에 귀신이 있을까?

또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된다는 저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워낙 무서움을 많이 탔던 성격 때문이다. 밤에 산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도 무서워할 만큼 모르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공포가 컸었다. 또 가끔 밥상머리에서 누구네 집에서 도깨비불이 새 나왔다더라, 다듬잇돌 소리가 났다더라 하는 부모님의 밥상머리 대화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내 공포심을 더 키우는 동력이 됐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당시에 내 궁금증을 해소해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왜?"


"아무래도 할머니가 저보다 일찍 돌아가실 거잖아요"


"그러겠지. 그런데 그건 왜?"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귀신이 진짜 있는지, 저 세상이 존재하는지 내 꿈에 나타나서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내 얘기를 들은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나도 저 세상이 있는지 귀신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내가 죽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니 꿈에 나타나서 꼭 알려주마"


나는 그날 할머니와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몇 년 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0월 어느 날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생사의 끝이 궁금했던 나는 혹시 할머니가 내 꿈에 나타나서 내 부탁을 들어주실까 싶어 은근 내꿈에 할머니가 나타나길 기다렸던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내 꿈에 나타나 주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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