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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Jul 03. 2023

미지의 세계, 봉인을 풀다

시골집 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내 일기장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썼던 일기장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스물세 살까지 꾸준하게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속상하거나 슬프거나 또는 기쁠 때 일기장에 마음을 내려놓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시에는 열쇠 달린 일기장이 한참 인기였다. 그래서 오빠 생일 선물도 열쇠 달린 일기장을 선물했던 것 같다.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있다는 듯이 일기를 쓰고 열쇠를 잠가놓곤 했던 그 시절. 가만히 떠 올려 보면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30년이나 지난 일기장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 내심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일기장의 자물쇠만 있고 열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 그래서 뾰족한 것을 찾아다가 일기장 자물쇠를 열었다. 일기장을 펼쳐보기 전에는 그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심오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막상 일기장을 펼쳐보니 내용이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또 글씨는 나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악필 중에 악필이었다.


헉!~ 일기장을 열어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이왕 열었으니 한 번 읽어보자 싶어 몇 장 읽다 보니 내 고등학교 시절의 한 페이지가 그려졌다.


집이 워낙 시골이라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자취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교무실 청소도 자청해서 할 만큼 적극적이었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선생님 눈에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교무실 청소를 하면서 들꽃을 꺾었다가 선생님 자리에 꽂아 놓는가 하면 하교 후에 학교 테니스장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하교 후에 테니스장에 모여 테니스 치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님 눈에 한 번 더 들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 또 같이 자취하는 친구 중에는 선생님과 대적해서 테니스를 치는 친구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잘 생긴 총각 선생님을 쫓아다니는가 하면 총각 선생님 눈에 들기 위해서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던 시절이었다. 나도 윤리선생님이셨던 노재학 선생님을 엄청 좋아했다. 웃을 때마다 볼우물이 페이는 선생님은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하교 길에 우연히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우리 자취방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시는 것이 아닌가? 혹 우리 자취방에 가정 방문 오시는 길은 아닐 텐데 싶어 숨소리조차 삼켜가며 살금살금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우리 자취방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다른 집 대문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자취방 아래 아랫집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된 나는 같이 자취하는 친구들을 불러놓고


"얘들아!~ 빨리 이리 와봐! 노재학 선생님 사는 곳을 알아냈어

  니들 놀라지 마라! 그게 있잖아. 저 아래 식품점집 세 번째 창문이 노재학 선생님 하숙방이야"


"정말? "


친구들도 무슨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듯이 기뻐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엽서에 편지를 써서 초콜릿과 함께 선생님 하숙방에 던져놓고 도망치는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식품점 들마루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리다가 먼발치에서 선생님 모습이 보이면 얼른 물건을 고르는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아무리 선생님한테 사랑을 고백해도 선생님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얘들아! 선생님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거겠지?


"아냐~ 그 방이 선생님 방이 아닐 수도 있어"


우리들은 나름의 이유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내가 선생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선생님 과목은 무조건 백점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시험 기간만 되면 한 달 전부터 학교에 가서 밤을 새 가면서 시험공부에 올인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순위권 안에 드는 학생이 될 수 있었다.


일기장 페이지 어딘가에 선생님에 대한 내용이 있을 텐데, 그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 두기로 하고 다시 일기장의 자물쇠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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