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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Sep 26. 2023

내친김에 추억 털기... 나의 대전 입성기

2. 내친김에 추억 털기... 나의 대전 입성기

     

먼 타지에 와서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번 월급의 딱 절반이 사라졌지만 어디다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더더구나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가슴에 묻고 갈 일이라고 판단했다. ‘뭐 한 번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용돈 줬다고 생각하자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러고 또 한 달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아이의 도시락을 챙겨주면서 회사에 출퇴근을 했다. 그러는 사이 그다음달 월급날이 돌아왔다. 이제는 월급날이 기쁘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또 돈이 사라지면 어쩌지 싶은 불안감이 먼저 엄습했다. 직원한테 월급을 맡겼다가 낼 아침에 가져다 달라고 할까?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다가 설마 한 번 그랬는데 또 그러겠어?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꼼꼼하게 잘 숨겨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장롱 깊숙이에 월급봉투가 든 핸드백을 숨겨 놓고 평소처럼 저녁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장롱 깊은 곳에 숨겨둔 핸드백을 찾아 월급봉투를 세어봤다. 헉! 또 딱 절반의 금액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와 공중전화에 매달려 엄마한테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하소연을 했다.


마침 운동화 바닥이 다 닳아서 빗물이 새어 들어서 발가락 사이로 누런 황토물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월급 타면 새 운동화를 사 신으려던 참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빗방울에 섞여 양 볼을 타고 흐르는 사이 운동화에 새어든 흙탕물을 발로 꾹꾹 짜내면서 공중전화에 매달려 엄마한테 울고불고 이러쿵저러쿵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엄마도 당장 방을 얻어줄 수 없는 형편이다 보니 나보고 더 조심하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당장 그 집에서 나오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문제지만 대학에 다니고 있던 오빠도 문제였다. 그래도 스물두 살이나 먹은 딸이 공중전화에서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듣고 엄마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엄마가 그 집에 가서 우리 딸이 집에서 월급의 절반을 두 번이나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날 저녁에 그 집 큰 언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너 니 눈으로 봤어. 갈데없다고 해서 우리 집에 살게 해 줬더니 뭐라고, 내 동생을 도둑으로 몰라.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우리 엄마가 동네에서 도둑질하다 몇 번 들켜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내 동생까지 도둑으로 몰면 어떡하니? 당장 다른 곳에 나가 살던가. 아니면 조용히 살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일을 오빠한테 얘기했더니 오빠가 엄청 화를 내면서 내가 그 년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래서 일단 오빠를 진정시키고 우리가 증거를 꼭 잡아야 한다고 다독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오빠가 학교에 가면서 오빠 방에 3만 원만 놓고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대학에 다니던 오빠 용돈까지 책임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하얀 A4용지에 오빠에게 전할 짧은 편지를 쓴 후 3만 원과 종이를 함께 겹쳐 접어서 오빠 방에 두고 나왔다. 그런 다음 퇴근할 즈음에 오빠한테 전화를 해서 방에 3만 원 두고 나온 거 챙겼냐고 물었더니 방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손으로 나왔는데 무슨 얘기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집 손녀딸이 학교에서 친구들을 집에 잔뜩 데리고 와서 놀고 있는 방문 앞 쓰레기통을 몰래 뒤져봤다. 그 쓰레기통 안에 내가 오빠에게 주려고 써 놓았던 A4용지가 구겨진 채로 들어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종이를 챙긴 후에 그 집 손녀딸 친구들이 다 돌아간 후에 그 아이를 불러 추궁했다. 그랬더니 용돈이 부족해서 가져다 썼다고 자백했다. 그전에 월급도 가져가지 않았냐고 했더니 월급은 손대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그날, 나는 대충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왔다. 다행히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았던 터라 집에서 나오는 마음이 편했다. 만약 할머니가 집에 계셨으면 나는 또 그 일을 가슴에 묻고 그 집에 한동안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오밤중에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거기다가 마침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시작한 방송통신대 학기 중이라 시험 기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잘됐다 싶어 독서실에 짐을 풀었다.


독서실에서 밤새서 공부를 한 뒤에, 아침에 겨우 세수를 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틴 후에 만기가 된 적금을 찾아 오빠와 내가 머물 수 있는 집을 알아봤다. 하지만 당시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본 건물에 조립식으로 덧댄 방 두칸 집이었다. 벽지는 누덕누덕 찢어지고 장판도 여기저기 찢어진 방이었다. 하지만 그 방조차도 나에게는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모은 적금에 엄마가 보태준 100만 원을 더해 5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오빠와 1년을 살고 나서 다시 1년 만기 적금을 타서 1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어 대흥동으로 이사했다. 대전극장 바로 뒤에 있던 그 집은 방이 운동장처럼 넓은 2층 독채였다. 시내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좋았을 뿐 아니라 방이 워낙 넓어서 오빠 친구들도 놀러 오고 휴가철에 동네 오빠들이 놀러 와서 머물다 갈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집에서 자기 딸이 훔쳐간 돈이라면서 수표 몇 장을 엄마한테 가지고 왔다고 한다. 엄마가 그 돈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전화로 물어보셔서 그냥 받지 말고 돌려주라고 말씀드렸다. 이왕 잃어버린 돈이니 그동안 할머니가 나한테 잘해주신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안 돌려받겠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그 뒤로도 할머니 생각만 하면 마음 한쪽이 짠하게 아파왔다.


할머니는 결국 손녀들 뒷바라지만 하시다가 요양원에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내복이라도 한 벌 사서 할머니한테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몇 년 후 할머니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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