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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11. 2022

짚은 안개를 따라갔던 날 2

내 마음과 무관하게 쏜살같이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는 베프의 함이 들어가는 날이었다.


친구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안양으로 향했다. 그날 신부 친정에 모인 결혼 적령기 청춘 남녀들은 내심 상대편 친구들을 염탐하느라 바빴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결국 결혼식 피로연에 서 누군가 얽히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신부 친정에서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드디어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 새날이 밝았다.   


다음날 예정된 결혼식이 진행됐다. 마지막 순서에 신랑 신부가 퇴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우리는 다시 피로연장에 도착해 있었다.


서먹한 분위기가 쉽게 풀리지 않자 괜스레 술잔만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워낙 촌 태생들이라 더 이상 특별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가 결혼식장까지 와 준 친구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친구들 명단을 가지고 신랑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온 신부가 블루스 곡에 맞춰 남과 여를 한 쌍씩 붙여줬다. 그날 친구가 정해준 내 파트너는 신랑 친구 중에서 전교 1등만 했다는 동네 엄친아였다. 친구는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그가 사법고시 준비생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2주 후 친구는 그 남자와 함께 오라는 조건을 붙여 우리 두 사람을 집들이에 초대했다.     


집들이에 초대받은 우리는 대전 버스터미널에서 당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소 같았으면 두 시간 남짓 걸렸을 시간인데 버스가 중간에 고장 나면서 한 시간 정도 도착 시간이 더 늘어졌다. 버스에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그가 덥석 내 손을 끌어당기며 내 손금을 봐주겠단다. 그 순간 촌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손금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어렵게 한 마디를 뱉어냈다.   


"저 생명줄이 짧으시네요~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나요?"     


사실 친구 결혼식을 앞두고 폭풍 다이어트를 해서 부작용이 생긴 상황이었다. 지하상가 입구에서도, 살 빼기 교실 샤워실 앞에서도, 심지어는 집에서까지 현기증을 느끼다 쓰러졌던 터라 그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 말은 내가 몇 살까지 살진 모르겠으나 사는 동안 자기가 옆에서 지켜 주겠단다. 이 말뜻이 뭔지 몰라 잠시 헷갈렸지만 대놓고 물어볼 만큼 숫기도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돌멩이가 조용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고만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혼집에 도착했을 땐 멋진 실내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다 드라마에 나오는 벽난로에 고급 장식장까지 한 마디로 부잣집이 분명했다. 친구 시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신혼방 구경에 나섰다. 하얀색 레이스 침대보가 덮인 고급 침대가 무척 정갈해 보였다. 침대에 맞춘 다른 가구들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우리는 무엇보다 친구의 신혼 재미가 가장 궁금했다. 예전과 다르게 나긋나긋하게 변한 친구가 방문을 닫더니 우리를 향해 가까이 모이라는 손짓을 보냈다. 우리는 깨 볶는 신혼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친구를 향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내가 신랑 실크 넥타이를 몽땅 세탁기에 넣었다가 다 망쳐 버렸어. 실크는 세탁기에 빠는 것이 아니고 세탁소에 맡기는 거래, 어머니 앞에서 민망해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실크를 알았어야지......


또 하나는 신랑이 매일 장미꽃 한 송이씩 사 들고 오는 거야. 처음 며칠은 장미꽃 받는 재미에 행복했지.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니까 넥타이를 다시 사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꽃값이 아깝더라~ 그래서 신랑한테 금방 시드는 꽃이 아까우니까 장미꽃 살 돈을 매일 나한테 달라고 했어!"     


그땐 시집살이가 뭔지도 모른 채 친구의 신혼 얘기가 마냥 부러웠다. 그 사이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시는 친구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조심스럽게 밥상 앞에 앉아 밥 먹던 나를 유독 주시하는 눈빛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식사를 이어가던 중 친구 시어머니가 동네 엄친아였다는 그 남자에 대한 칭찬을 시작하셨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상황에서 겨우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읍내 볼링장으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간 볼링장이라 볼링공을 던질 때마다 고랑에 빠져서 굴러갔다. 그러는 사이 볼링 게임이 끝났다. 승부와 상관없이 맘대로 안 되는 볼링공 때문에 뒷골이 당겼는데 내심 속이 다 후련했다. 볼링장에서 나와보니 온 세상이 안개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서해안 바닷가 지형이라 유난히 안개가 많았다.  

   

그날의 사건은 안개가 쳐 놓은 덫에 아무 맥락도 없이 걸려든 것이었다. 그날 밤, 한 시간 남짓 되는 안갯속을 걷는 동안 그 누구도 끈적한 안개의 촉감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모두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져 걸음의 속도를 낮추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뒤로 처지는 쌍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그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틈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 앞에 전개될 어떤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안개가 펼쳐준 어떤 야릇한 분위기에 떠밀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게 손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날 손을 허락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졸업식이 있던 며칠 전, 제자들에게 들려준 담임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를 와장창 깨는 행동이었다.


그날 제자들 앞에 선 김현숙 선생님께서는


"스무 살이 넘어가면 아버지 외 어떤 남자에게도 손을 함부로 허락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 외에 세상의 모든 남자는 다 도둑이다.

반드시 결혼할 상대가 아니면 절대 손을 허락하면 안 된다"


선생님은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몇 번씩 강조하며 당부했다. 선생님의 당부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당시엔 중학교만 졸업하고 산업체 고등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혹여 제자들이 여공으로 일하다가 섣불리 잘못된 연애에 휘말려 상처받을까 봐 미리 부적을 붙여주신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선생님이 당부한 금기를 깨고 친구를 따라 안개 마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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