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라니』 (출판사 마저)는 이은선 작가가 2년 6개월 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근현대 작가의 생가와 문학관, 집필실 등을 둘러보며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한 느낌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작가의 깊은 문학사적 통찰과 역사의식으로 근현대사의 맥락을 새롭게 짚어가는 문학 이야기다. 본문에 등장하는 기억의 공간들은 근현대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흔적부터 세월호기억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무게감이 크게 느껴지는 장소들이다.
그래서 『백석이라니』 이 한권의 책속에는 우리 근현대 문학사의 큰 산맥을 형성한 박경리, 김승옥, 김유정, 이문구, 이효석, 황순원, 기형도, 윤동주, 현기영, 한강, 만해 한용운, 천상병, 정지용, 백석, 김춘수, 최명희, 박완서, 유치환, 임철우, 최두석, 박목월 외 '세월호 제주 기억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문학과 사랑 그리고 역사를 관통해 온 시대의 아픔과 견딤이 오롯이 녹아 있다.
작가의 순수한 사랑부터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의 한 복판에서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한글문학 활동을 펼쳐왔던 작가들의 이야기,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될 5.18광주민주항쟁, 제주4.3항쟁, 세월호 기억관 등을 통해 이은선 작가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들이 남긴 진실을 파헤친다.
작가는 표제작인 「백석이라면」에서 백석 시인이 사랑하는 여인 '난'을 만나러 통영에 갔지만 단번에 거절당한 사연을 들고 시인이 '난'을 그리워하며 앉아 있었던 충렬사 계단을 찾는다.
“천희’ 혹은 ‘란’을 기다렸다는 충렬 사 앞은 절기는 겨울이지만 아직 가을을 품은 노란 은행잎이 빗줄기처럼 흩뿌려지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백석이 앉아 있던 걸까, 저 우물가에 정말로 란이 다녀갔을까 하며 통영 곳곳을 거닐었다. 사랑을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단박에 거절 당 한 사람의 마음이 되어 통영 곳곳을 다녀 보았다.”
-「백석이라니」 본문 중에서
그런가 하면 보령에 있는 이문구 선생 작업실 편에서는 작가가 여고시절에 만난 이문구 선생을 소환한다.
여고시절 이정록 시인의 제자였던 작가는 선생님을 따라 백일장에 나갔다가 낙선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과 찾은 청라 저수지에서 수풀 사이에서 나타난 허름한 메리야스에 낡은 츄리닝 바지를 입은 무섭게 생긴 아저씨를 기억에서 불러낸다.
치킨과 유리병을 치우지도 않고 버스를 타기 위해 자리를 뜬 후에 깨진 병 조각을 밟고 넘어진 츄리닝 아저씨의 외마디 소리를 떠 올린다. 그리고 미안해하는 여고생과 괜찮다며 얼른 가라고 하던 아저씨의 일화를 소개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그 아저씨가 바로 이문구 소설가였다는 것을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다.
‘광주 임철우 소설 「봄날」’에서는 “그날 친구와의 만남은 불발되었다”는 단 한 문장으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한과 절규를 암시한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스승이었던 임철우 소설가의 작품을 꿰뚫고 있는 이은선 작가는 당시 광주의 참사에 대해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되비쳐주는 거울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작가의 역사의식은 4.3 기념관과 한강의 작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행불인 묘역까지 길을 안내해준 제주 토박이 문학평론가 김동현 박사는 4.3항쟁과 제주를 외지인들이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하는가라는 작가의 질문에 4.3항쟁을 제주의 아픈 역사로만 바라보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지나간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미래을 내다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사건이라는 말이었다. 그 거울은 계속해서 닦아줘야 한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누구나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다시 순이 삼촌 곁이라니」 본문 중에서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쏜 군인들과 그들을 그 자리에 서게 만든 자의 명령이 그 열흘의 광주를 만들었다. 열흘이 훨씬 지나 34년이 흘러도, 2021년이 와도 광주는 계속해서 어디선가 ‘되태어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산화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광주’라고 한강은 말한다.
「소년이 온 그 푸르른 봄날이라니」 본문 중에서
그런가 하면 세월호기억관에서는 읽는 내내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단원고와 가까운 고등학교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또래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작가의 마음이 짐작이 될 것 같다.
2015년 4월 16일. 소설 마감과 학교 수업이 연달이 있어서 밤새워 일하고 정신없이 등교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의 행동이, 교실의 공기가 여느 날과 사뭇 달랐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싶어 마주 앉은 학생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몇몇이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우는 소리만 돌아왔다. 단원고와는 10여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전원이 구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퍼졌고 학생들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봄의 금요일이라니」 본문 중에서
작가는 단원고 학생들이 못다 한 수학여행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마무리해 주고 싶었다. 매년 가오는 봄 어느 금요일에는 꼭 꿈으로라도, 바람이나 이슬, 햇살로라도 다가와 주기를, 후생에는 꼭 다시 태어나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수학여행 길에 동참한다.
천상병 시인의 지인들이 천상병 시인이 죽은 줄 알고 출간한 유고시집 『새를 들고』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천상병 시인을 찾아갔을 때 천상병 시인의 첫 마디가 “내 인세는 어찌 되었노?”였다는 말에서는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또 천상병 시인이 죽은 뒤 남은 조의금이 아궁이에서 불타 버린 사연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은선 작가는 “백석이라니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한 생을 오롯하게 글을 쓰면서 열심히 애달프게 멋지게 살았던 작가들의 시간이 펼쳐 진다”면서 “그들의 삶을 슬쩍 엿볼 수 있는 여행을 계획을 세우든가 아니면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책장을 넘기면서 작가의 땅을 돌아보면 그 어떤 여행보다도 멋진 시간이 될 것”이라고 본문 내용을 안내한다.
이 책의 편집자는 “백석의 첫사랑이 궁금하신 분, 김춘수의 꽃을 읽고 누가 이름을 부르면 설렜던 분,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마음 아팠던 분, 천상병의 '가난이 직업'이라는 시 구절을 읽고 공감했던 분, 박완서의 필력과 상상력이 부러우셨던 분. 윤동주의 서시를 수십번 읽으신 분들께 추천한다”고 밝혔다.
‘~라니’는 ‘이다’, ‘아니다’의 어간이나 선어말 어미 ‘-으시-’의 뒤에 붙어, 뜻밖의 사실에 놀라거나 반문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각 챕터마다 ‘~라니’로 시작되는 이 책은 독자가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이은선 작가는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코끼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다. 소설집 『발치카 No.9』(문학과 지성), 『유빙의 숲』(문학동네)외에 『구럼비를 사랑한 별이의 노래』 『소설 제주』 『파인다이닝』 『호텔 프린스』등의 공저가 있다. 현재는 긴 소설을 쓰면서 다인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