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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15. 2022

출산과 혼절, 그리고 작은 희망

공무원 시험 스트레스를 벗어던지고 치료에 전념하면서 애 아빠를 괴롭히던 편두통 증상들이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그러는 사이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꽉 동여맨 뱃속에서 아가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출산예정일을 10여 일 앞둔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그 당시 나는 출산이 임박해지면 붉그스름한 이슬 같은 것이 비친다고 들었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기 때문에 양수라는 의심도 못했다.


"그럼 엄마는 양수가 터진 것도 몰랐던 거야?"


"응 그랬어"


새벽녘에 갑자기 뭔가가 훅하고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확인해 보니 옷과 이불이 젖어 있었다. 그래서 혹 내가 자다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 애 아빠가 깨기 전에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 훅하고 쏟아졌다. 그제야 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빨리 병원으로 오란다.


임신도 처음이었고 출산도 처음이었던 나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독서실에 가는 애 아빠 아침을 차려주고 나서 막 집을 나서려는 순간, 같이 사는 시동생이 한 무리의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왔다. 그래서 또 할 수 없이 짐을 내려놓고 시동생 친구들에게 라면을 끓여서 점심을 대접하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는 사이 안방 벽시계가 늦은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진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30여분 거리였다. 워낙 어려운 형편이라 택시 탈 생각도 못하고 진통이 오는 배를 움켜잡고 병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병원 도착 10분 전 진통이 더 강하게 느껴져서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쉬었다 일어나서 다시 걸었다. 그렇게 오후 5시쯤 병원에 도착했다.


상황을 확인한 의사가 나를 바로 분만실에 눕혔다. 본격적으로 진통이 시작됐다. 별이 두 개 보여야 아기가 나온다는 출산 선배들의 말을 되뇌면서 있는 힘껏 힘을 줬다. 그렇게 진통 30분 만에 아이가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워낙 뱃속에서 시달려서 그런지 3.15킬로에 머리만 엄청 커다란 남자아이였다. 출산 직후 간호사와 시댁 형님의 부축을 받아 2층 입원실로 걸어서 이동했다.


2층 입원실에 도착하는 순간 바로 혼절했다. 혼절한 상태에서 본 세상은 한 다섯 살쯤 된 내가 예쁜 꽃들이 엄청 많이 피어 있는 너른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꽃들이 많이 핀 들판을 따라 어딘가를 향해 막 걸어가던 참이었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시댁 형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끌어안고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순간에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양수가 다 말라버린 상태에서 촉진제도 안 맞고  힘을 준 탓에 출산 직후 쇼크가 왔다고 한다.


“엄마 오빠 낳고 죽을 뻔했네”


“그랬지, 큰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 순간에 죽었을지도 모르지”


낳는 것은 힘들었지만 자연분만이라 다행히 회복은 빠른 편이었다. 출산 다음 날 아기를 안고 집으로 퇴원했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어머니가 한 3일 정도 산후조리를 해 주셨다. 시어머니가 해 주시는 산후조리는 아무리 잘 챙겨주신다고 해도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었다. 그래서 출산 3일 후에 아기를 안고 친정으로 향했다.


결혼식도 안 올린 딸이 아기를 낳아 친정에 왔는데 사위라는 사람은 직업도 없는 백수였으니 친정부모님 마음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그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 애 아빠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 터, 그래서 내가 타고 들어간 택시에 애 아빠를 태워서 바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혼자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산후조리를 하던 어느 날, 엄마가 조용히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지금도 안 늦었다. 애는 엄마가 키워 줄 테니까 평생직장도 못 잡고 반거챙이로 너 고생만 시킬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정리해라. 애 걱정은 말고...”


“엄마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요. 저는 애 아빠 믿어요.

 그리고 제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끝까지 제가 책임질 거예요.  

 그러니까 행여라도 애 아빠 앞에서 싫은 내색 눈곱만큼도 하지 말아 주세요 “


내가 너무 단호하게 얘기하니까 친정엄마도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렇게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뒤 공무원 시험 날이 됐다. 애 아빠가 그동안 해 왔던 것이 있으니까 시험이라도 한 번 봐 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결과는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아프지만 않았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미 떠난 버스였다.


“아빠가 아파서 공부를 못해서 시험에 떨어졌구나. 안타깝네

 시험에 떨어진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엄마? “


“응 본래 7급 준비를 했는데 7급 포기하고 그냥 9급 시험을 봤어”


“그래서 9급은 붙었어?”


“응 정보통신부 시험은 1등으로 붙었고 대전시도 합격했어”


당시 애 아빠는 비록 본인이 하고자 했던 7급은 아니었지만 9급이라도 붙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기가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다면서 무척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 아빠는 신경이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며 바로 편두통 증상으로 나타났다. 본인 증언에 의하면 군대 갔을 때 개머리판으로 맞은 이후로 편두통 증상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애 아빠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가 어린 시절에 다섯 살 된 동생이 하늘나라로 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모친의 슬픔 그리고 그 이후로 자식들에게 냉담했던 모친의 성정까지... 어쩌면 온갖 상처와 결핍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었다.


또 둘째로 태어나 대대로 모든 결정과 권한이 장자 위주였던 집안 환경에서 형성된 결핍과 열등감으로 인해 남한테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 강한 성격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런 집안 환경에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오로지 공부만 파고들었던 청소년기를 보낸 덕에 전교 1등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애 아빠의 신경통을 유발했던 것이고 그 이후로도 애 아빠의 편두통은 내 숨통을 조이는 족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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