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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14. 2022

 바람 앞에 촛불처럼 시작한 출발

당시만 해도 괜히 공부하고 있는 사람 꼬드겨서 애 만들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예비 시댁에 다녀온 그는 “니가 지금 정신이 있는 놈이냐” 그리고 “니가 지금 애를 만들 상황이냐”고 엄청 혼이 났다고 한다. 나한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에 대한 원망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떤 해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문방구에서 사 온 화선지 위에 붓펜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여 편지를 써 내려갔다. 저는 OOO씨와 사귀고 있는 누구다. 이렇게 갑자기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 그러면서 화선지에 써 내려간 글씨 위에 눈물이 떨어져서 글씨가 번지는 것도 모른 채 구구절절 길고 긴 편지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눈물로 쓴 편지를 예비 시댁에 보내고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오만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집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예비 시아버지는 유독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내 편지를 받고 감동을 하셨는지 금방 함께 살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딸이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엄마가 전셋집 얻는다고 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러하고 했어?”


“아니 방은 남자 쪽에서 구하는 거라면서 방을 얻어 주겠다고 하셨어”


조건은 천만 원을 줄 테니 두 칸 자리 방을 얻어서 동갑내기 시동생을 데리고 살라는 것이었다. 당시엔 천만 원으로는 주택 2층 독채 전세는 택도 없었다. 최소 천오백만 원은 있어야 허름한 집이라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예비 시부모님이 주신 천만 원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 곳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내가 백만 원을 더해서 천백만 원짜리 2층 단독주택 전세를 얻었다.


첫 신혼집이었다. 그런데 워낙 싼 집이라 가파른 이층 계단도 모자라 쇠붙이로 된 난간이 덜렁덜렁해서 바람만 불면 풍선 춤을 춰댔다. 당시 만삭의 임산부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기엔 꽤 위험해 보이는 집이었지만 주어진 예산 안에서 집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더 먼저였다. 그렇게 임신 육 개월 되던 때에 햇빛도 잘 안 드는 집에서 내 자취방에서 옮겨온 살림으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럼 그때부터 아빠랑 같이 살았던 거야?”


“응 그랬지”


공시생 백수와 시작한 신혼살림이라 누군가 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뱃속에는 6개월째 접어든 아들이 씩씩하게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계속 직장에 나가기로 했다.


“그럼 엄마는 오빠 임신하고도 회사에 나갔어?


“응 그랬었어. 아빠가 돈을 못 벌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은 벌어야 했었어”


그 당시 나는 불러오는 배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올인원 위에 압박 거들까지 층층이 챙겨 입고 임신 8개월까지 똥배가 많이 나왔다는 핑계를 대면서 직장에 나갔다. 그리고 9개월째 사표를 내고 대학교 정문에 서서 새로 나온 음료수 시음행사 아르바이트를 자청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기미가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본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백옥 같은 피부가 전부인데 어쩌다 기미 밭이 돼 있었던 것이다.


“신혼집은 어땠어?”


“응. 1층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말 그대로 비만 오면 똥물이 튀어서 볼일을 볼 수 없는 그런 집이었어. 하지만 그때 엄마는 니 아빠랑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어. 그래서 엄마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좁은 집에 원목 장롱과 삼성 최신형 세탁기, 냉장고, 대형 TV를 사서 들여놨어 그리고 나머지 돈은 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손 안 벌리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생활비로 썼었어”


“그랬구나! 엄마가 처음부터 많이 힘들었겠네”


“그런데 한 구비 넘으니까 또 한 구비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게 뭔데?”


어렵게 집을 구해서 동갑내기 시동생과 함께 이사를 하고 조금 안정이 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을 두어 달 앞두고 독서실에 다녀오던 애 아빠가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이유 없이 토하는 것도 모자라 심한 두통에 시력 감퇴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당시 새마을금고에 다니던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보문산 근처에 있는 용한 한의원을 소개해 줬다.


"시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뇌출혈 증상이 살짝 온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시험은 포기하고 당분간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요양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란 말인가. 나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우선 시험을 포기시켰다. 그리고 당분간 안정을 취하면서 한약치료와 침 치료를 병행해 보자고 위로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답이 없는 상황이었음에 틀림없다. 나 또한 엄마가 살아왔던 것처럼 여자도 뭣도 없었다. 그냥 뱃속에 든 아기를 지키기 위해 직업도 없는 공시생에다 건강까지 위태로운 한 남자를 붙잡고 함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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