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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20. 2022

맞바람, 글 바람

난생처음 살아보는 아파트에서의 삶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즈음 나는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글쓰기 취미에 푹 빠져 있었다. 글쓰기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펜팔 대필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엔 잡지책 맨 뒤에 실려있는 펜팔 란에서 주소를 하나씩 찾아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군인 아저씨한테 위문편지 쓰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있었다. 워낙 아버지 무릎에서부터 편지 쓰기를 읽힌 나는 단연 우리 반의 펜팔 왕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친구들이 군인 아저씨 주소를 하나씩 들고 와서 편지 대필을 부탁했다. 당연히 답례는 펜팔 가지치기였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 편지 대필 작가로 입문했다. 물론 대가로 받은 펜팔 덕에 동시에 3명과 펜팔을 할 정도로 편지 쓰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하지만 나름 펜팔의 원칙이 있었으니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름 우등생이자 모범생의 면모를 갖췄던 만큼 편지로 소통은 하되 절대 대면 만남은 없다는 원칙하에 펜팔을 이어갔다.


"엄마는 그때부터 글을 잘 썼던 거야?"


"뭐 잘 썼다기보다는 글 쓰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언제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 거야?


"응 결혼 전에는 해태에 다닐 때라서 사보에 편지를 보내서 원고료를 받았었고, 또 생활정보지 편지 공모에 당선돼서 상품권을 받았거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오빠 낳고 너를 임신했을 때부터 글쓰기 바람이 불었던 것 같아"


그랬었다. 첫 아이를 낳고 애 아빠가 첫 신뢰를 깨뜨렸던 그 순간부터 나의 자아 찾기에 시동이 걸렸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가정주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국에 편지 보내는 특기를 되살려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편지가 방송에서 읽히기 시작하면서 양복 상품권부터 커피잔 세트 등등 살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던 중 대전에 있는 지역 방송에 보낸 편지가 채택되어 애들 아빠를 방송에 출연시켰다.


"아빠가 방송에 나갔어? 어떤 내용으로 나갔는데?"


"응 그때 전국적으로 주민등록을 갱신하던 때였는데 아빠가 주민등록 갱신 업무를 맡아서 많이 힘들어할 때였어. 그래서 엄마가 응원 편지를 방송국에 보냈는데 그 방송이 1 일주 동안 방영이 된 거야"


아무도 모르게 계획한 이벤트가 대히트를 치면서 주변에 있는 사돈에 팔촌까지 방송을 봤다면서 안부를 물어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가 역사나 한문에 어둡다고 애 아빠한테 괄시를 많이 받았던 터였는데 성공한 이벤트 덕분에 차츰 집안에서의 내 존재감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2층 사는 예진이 엄마가 인터넷에 글 쓰는 방법도 알려주고 인터넷 동호회 가입 방법 등을 알려줬다. 한마디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그럼 엄마는 그때까지 인터넷을 할 줄 몰랐어?'


"응 인터넷을 전혀 할 줄 몰랐어.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몰랐고... 다만 타자를 배웠기 때문에 자판은 잘 쳤었어"


그때부터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해서 매일매일 게시판에 생활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자들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하잘것없던 가정주부인 나를 대단한 작가처럼 대우해 주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손가락에 날개를 달고 좀 더 과감한 주제로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활동하는 사이에 인터넷상에서 내 인기도 점차 높아져갔다.


하나는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가꾼다는 의미의 '農詩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흔부터 쉰 살까지라는 '흔&쉰', 그리고 '71 돼지들의 독무대'라는 동호회였다. 가장 열심히 활동한 곳은 農詩모임이었고 그다음에 열정을 받쳐 글을 쓴 곳은 '흔&쉰' 동호회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흔&쉰' 은 가입 조건이 마흔 살부터 오십대까지였는데 당시 서른 초반이었던 내가 특별우대로 가입이 허락됐던 것이다. 또 거기다  대령으로 예편한 '흔&쉰' 동호회 회장님께서 내 닉네임을 '두레'라고 지어주면서 글쓰기를 독려했다.


집에서는 무식한 아줌마 취급만 받다가 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삶에 활력도 생겨서 매일매일 뭔가를 열심히 써서 게시판에 올렸던 기억이 난다. 또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책도 열심히 읽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동호회 회원들이 각지에서 직접 농사지은 상추부터 시금치를 보내주는가 하면 어떤 분은 화이트데이에 막대 사탕을 한 아름씩 사서 보내 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동호회에서 글 잘 쓰는 국민 조카 대우를 받았었다.


"그럼 언제부터 본격적인 시 공부를 시작한 거야 엄마?"


"그렇게 인터넷 글쓰기에 푹 빠져 살던 어느 날, 집으로 전단지 한 장이 날아왔어

 집 근처 대학에 있는 평생교육원에서 시 창작 교육생을 모집하는 전단지였어.

 그 전단지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 숨겨놨던 불씨가 확 되살아 난 거야"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시 창작 교육에 참여하게 됐다. 지금도 첫 수업에서 받았던 인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작 시라고 하면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나 읇조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당시 시 창작교실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오세영 시인의 '그릇'을 좋아한다는 사람부터 대학에서부터 영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까지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때 시창작반 막내였던 내 눈에 비친 언니들은 모두 다 세련되고 시도 잘 쓰는 것 같았다. 하루는 언니들이 저녁을 먹고 들어가라는 말에 내가 안된다고 저녁 전에 집에 가서 밥을 해놔야 한다고 했더니 언니들 중에 한 명이 내가 책임질 테니 나만 믿고 저녁을 먹고 들어가라고 붙잡았다.


그때가 결혼 이후 난생 처음으로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언니가 우리 집까지 따라와서 애들 아빠한테 자기가 저녁 먹고 들어가라고 붙잡았다면서 나를 변호했다. 그렇게 나는 시창작반에서 만난 언니들을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세상에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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