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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18. 2022

신내림 받은 주인 아주머니의 당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신내림을 받고 집 마당 한 켠에 신당을 차렸다. 하긴 보문산 아래 동네가 워낙 음기가 강한 곳이라서 하나 건너 한 집씩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음기가 강하다는 보문산 자락에서 둘째 아이를 임신해서 낳아 키운 셈이다. 여하튼 그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는 주인아주머니였다.      


당시 짧은 커트 머리의 주인아주머니는 홀로 어린 남매를 키워내느라 포장마차부터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이셨다. 3층 주택이었지만 1층 안채는 우리가 살고, 2층은 꽃집을 한다는 분들이 세 들어 살았다. 그리고 3층 조립식에는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청년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 세를 내어 주고 정작 주인댁은 1층 문간방에서 남매와 함께 살았다.      


당시 우리가 세 들어 살던 보문산 집은 씽크대에서 흘러나온 물이 주방 바닥으로 스며들어 눅눅했다. 혹여 모르고 발을 디뎠다가 양말이 젓는 날도 많았다. 그러던 중 계약 기간이 만료될 즈음에 애 아빠가 구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 떨어졌으므로 보문산 생활을 마무리하고 도마동 언덕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나름 처음 살아보는 아파트라 이삿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이사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지라 우리가 집을 빼는 날과 또 이사 갈 집에 지불할 돈 사이에서 시간이 조금만 틀어져도 길에서 이삿짐과 함께 길에서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보통 집안일에는 재능이 없는 애 아빠를 대신하여 3개월도 안 된 어린 것을 가슴에 매달고 이사 상황 전체를 지휘했다.      


다행히 보문산 주인은 순순히 전세금을 빼줬는데 문제는 이사 갈 집에서 이삿짐을 늦게 빼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삿짐 트럭을 대기시키고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입술이 부르트고 눈에서는 다래끼까지 올라왔다. 그 난리를 치르고 어렵게 도마동 생활이 시작됐다. 그런데 전 집 주인의 말이 왠지 마음에 거슬렸다.      


“새댁,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간다니 좋은 일인데.......”     


뭔가 찜찜한 표정을 짓던 주인아주머니께서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새댁, 집에 이삿짐을 들이기 전에 베란다에 향불이라도 잠시 켜 놨다가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 잡귀가 사라지거든. 내 말 꼭 잊지 말고 가거들랑 애들 잘 키우고 잘 살어”    

 

막상 이사 과정에서 온갖 진을 다 뺀 터라 비방이고 뭐고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왜 갑자기 전에 살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이 떠오른 것일까? 어렵게 시작한 결혼생활인데... 백수로 만나서 힘들게 견디다 어떻게 겨우 얻은 가정의 평화인데...     


각서 하나로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신뢰가 온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싶어 살면서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어떤 아량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갔던 애 아빠의 마음을 다잡아서 가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러던 중, 계획도 없이 들어선 둘째가 딸이었다,  그래 딸을 하나 더 낳아주면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생겼다.      


첫째 때와 달리 나름 열심히 태교도 하고 순산을 위해 운동도 열심히 했다. 애 아빠를 출근 시키고 나서 아장 아장 걷는 큰 아이와 보문산 놀이공원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새, 예정일이 다가왔다. 큰아이 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둘째 때는 좀 현명하게 대처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1998년 10월 24일 아침 7시부터 진통이 시작됐다. 일단 출근하려던 애 아빠를 대기시킨 후 이를 악물고 진통 간격을 재기 시작했다. 진통 간격이 10분대로 좁혀졌을 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의사가 된통 호통을 쳤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집에서 낳을 뻔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출산 준비를 마치고 분만실에 들어간 지 5분여 만에 4.15킬로의 여아를 순산했다. 다행히 둘째라 순산할 수 있었단다.      


그렇게 가족이 한 명 늘어 우리는 어느덧 4인 가족이 됐다. 몽땅 홀로 감당해야되는 육아스트레스를 당시 mbc에서 한창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육남매 드라마를 보면서 푸는 나날들이었다.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장미희 배우가 가난한 육남매를 키우기 위해서 떡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떡 팔러 다니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육남매의 엄마로 출연한 장미희의 드라마 속 대사였던 “떡 사세요”를 풍자한 “똑 사세요”가 사람들 입에 한동안 오르내렸다. 그래 저렇게 육남매 엄마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금이 간 신뢰를 이어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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