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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20. 2022

일장춘몽... 혼돈의 계절

일장춘몽


결혼식 전날 친정 엄니가 잘 간직하라며 넣어준 부적이 결혼 십 년 만에 감쪽같이 사라진 거라. 그날 밤, 웬 낯선 남자와 한바탕 정사 중에 화들짝 꿈에서 깨었는데, 결혼기념일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라 순간, 부적에 숨겨진 10년 전 비밀 하나 떠 올랐는데, 두 날짜 중 하나는 서방이 다른 하나는 마누라가 바람피우는 사주였다는 거라. 얼씨구! 워낙 급했던 터라 하는 수 없이 택일을 하면서도 백년해로하라고 할아버지가 손에 꼭 쥐어준 부적 두 장. 혼인 서약서처럼 지갑 속에 꼭꼭 챙긴 탓에 무사히 아이 둘은 만들었는디.


그렇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손녀사위보다 손녀딸 쪽을 택했을 할아버지. 그 깊은 뜻 이어받아 살금살금 자는 서방한테 수작을 걸어 보는디 얼씨구! 끙끙 앓으며 자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등 돌려 눕는 거라. 어라! 때는 이때다 싶어 꿈 해몽 책 뒤적이는 참에  얼쑤! 딴 남정네한테 받은 소싯적 연애편지 한 장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시집 <모서리를 접다> 중에서



혼전 임신 그리고 결혼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 두 사람의 궁합도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 나의 종조할아버지는 조계종 충남지부 회장을 하면서 포교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또 인근 군부대 충효교실 강사로 활동하시는 한편 간간이 부탁을 받고 무료 궁합을 봐주고 부적을 써 주곤 하셨다. 그런가 하면 수지침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다방면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인문학자셨다.


그런 종조할아버지께서 우리 두 사람의 궁합을 보고 결혼 날짜를 잡으셨다. 그런데 구정 에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두 날짜 중에 하나는 남자가 바람을 피울 날짜였고, 다른 하나는 여자가 바람을 피울 날짜였다고 한다. 그래서 종조할아버지께서 어떤 날짜를 택일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에 부쳐졌다.


다만 종조할아버지께서는 결혼 날짜를 잡으면서 부적 두 장을 써서 나에게 건네주시면서 지갑에 꼭 넣어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그 부적을 보물지도처럼 지갑에 잘 간직하고 다니다가 내가 시 창작 수업을 받으러 다닐 즈음에 분실했던 것 같다. 그땐 그 부적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고 그냥 할아버지가 주신 거니까 지갑에 넣어 다녔던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내 오랜 꿈을 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간 시창작반은 내 인생의 깊은 수렁이었다. 처음에는 정식으로 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마음에 들떠서 간 그곳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주 2회 수업이었는데 아침 밥상을 치우고 한 10분만 걸어가면 바로 학교였다. 오전 수업이라 크게 부담도 없었다.


다들 어느 정도 시를 배우고 온 사람들이라 나는 그냥 들러리 정도였다. 시를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고 또 타고 난 시적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잡글이나 쓰는 정도였다. 그 사이에서 시를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밤을 지새우면서 시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수강료도 내야하고 시집이나 필요한 책을 사 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쥐꼬리만한 공무원 월급을 쪼개고 쪼개서 아이들 학원 보내고 또 애들 아빠가 술김에 긁고 온 카드 대금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시창작반에 다니던 언니가 모 신문에서 리포터를 뽑는데 한 번 지원해 보라고 권유했다. 책값하고 수강료는 충분히 될거라면서...


“그때 신문사에 들어간 거야?”


“응 그랬어”


신문사에 리포터로 입사해서 맨 처음 받은 업무가 취재 기사 3 꼭지였다. 그런데 막상 취재는 어떻게 했는데 처음으로 기사를 쓸려니 어떻게 써야 될지 감이 안 잡혔다. 하루 온종일 혼자 끙끙 앓다가 신문사 본부장님께 멜을 보냈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겁도 없이 리포터 일을 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제가 맡은 기사를 펑크 내면 신문에 지장이 생길 것 같으니 이번에 맡은 꼭지는 어떻게든 마감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맡은 기사를 마감하겠다는 내 의지를 높이 평가한 본부장님이 계속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 주셔서 계속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신문사 리포터를 하면서 받은 원고료는 내 꿈을 응원해 주는 동력이었다. 그렇게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책도 사 보고 수강료를 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가족들과 짜장면 회식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감사했던 것은 매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배움의 기회였다. 당시 나는 '세 사람을 만나면 그 중에 한 명은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명언을 종교처럼 신봉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난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서 본받으려고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결혼 7년간 한 번도 애 아빠한테 말대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가장은 가족을 위해 평생 남의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가장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편안하게 해 줘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던 터였다. 그랬던 내가 시 창작 공부와 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말대꾸를 시작했다.


“그럼 엄마는 그동안에는 아빠하고 한 번도 안 싸웠어?”


“응 결혼 7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어. 엄마가 무조건 참고 살았으니까”


나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애 아빠는 이게 다 시를 배운다고 나돌아 다녀서 그렇다고 내 시 공부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자하고 도리깨는 밖으로 내돌리면 못쓰게 된다는 의식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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