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그린
대전에서 미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희정 시인이 72년전 한국전쟁 당시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자행된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시집 ‘서사시 골령골’을 발간했다.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용됐던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이 집단 학살돼 묻힌 곳이다. 7000명에서 1만여 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됨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번 시집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을 바탕으로 기획되어 총 49편의 시가 수록됐다. '1인칭 시점'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 교도소에 끌려가 처형당하고, 땅속에 묻힌 후 70여 년 세월을 그려낸 49편의 시가 수록됐다.
특히 서사시는 역사적 사건을 줄거리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서사시 골령골’은 49편의 연작시를 순서대로 쓰지 않고 한 편 한 편 독립적으로 창작한 점이 특징이다. 이 각각의 독립적인 시편들을 다 연결하면 하나의 이야기 시가 된다는 점에서 더 참신하게 다가온다.
소설적 기법을 동원해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詩를 끌고 간다. 시인이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되어 가족이란 무엇이고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에게 어떤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았을까에 대한 진술을 독백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올해도 벌초를 하지 못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벌초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이다
형은 어디에 묻혀있을까
억울하다는 말 피맺힌다는 말
가해자는 그 뜻 모른다
수천 명이 학살당했는데
왜, 죽어야 했는지
국가는 유가족 마음 외면하고 있다
몇몇 정치꾼들
빨갱이라서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꿈에서도 만날 수 없다
형은 동생이 보고 싶어도
이 땅에 오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혼이 되어서도 집에 올 수 없었다
아니었다, 내 가족이 당신처럼 끌려가
무참한 주검이 될까 봐
울타리 밖에서도 서성일 수 없었다
추석이면 이 산 저 산에서
예초기 소리 요란하다
산내 골령골엔 65년째
정적만 숨이 겨우 붙어 있다
-「벌초」 전문
시인의 말을 대신한 詩 「벌초」에는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한과 아픔이 시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희정 시인은 이번 시집의 기획 의도에서 “이번 시집에 수록된 49편의 의미는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 49일을 보내고 떠난다는 종교적인 의식이 담겨 있다”면서 “49제의 의식을 치루지 못한 원혼들의 마음에 빙의憑依해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역(대전)에서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보지 않고 학살로 희생된 분들의 죽음으로 남은 아픔, 상처, 슬픔, 억울함, 그리움, 기다림, 한恨을 개인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해 보고 시라는 이름으로 옷을 입혔다"면서 "더불어 유가족들의 아픔과 희생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저마다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망자들의 뼈아픈 한이 글 쓰는 내내 몸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듯한 경험으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김희정 시인은 200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 『아고라』.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유목의 피』. 『시詩서書화畵는 한 몸』. 『몸의 이름들』. 『허풍처럼』이 있다. 산문집에는 『십 원짜리 분노』. 『김희정 시인의 시 익는 빵집』을 출간했고 그림 감상 평: 『시각시각視覺視覺』과 중학생 글쓰기 교재: 『15분 글쓰기 여행』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