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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28. 2022

1.<내가 읽은 詩>롤리팝-이태윤

롤리팝



이태윤



트럭과 고양이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면
이 달콤한 속도가 길을 분만한다면
그 길에서 살찐 테너가 매일 나에게 걸어와
삼십 년째 같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준다면
하품을 하던 하마가
하품 속으로 자신의 몸을 풍덩 빠뜨리듯
봄이 오고 마침내 오늘이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으로 나눠진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진실
하늘에서 커다란 사탕이 녹고 있다

만일과 어쩌면 사이로
떠오른 태양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로 가득해서
태양이 아니라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지
견딜 수 없이 지루해진 우리는
우리의 자작극에 삶이 속아 넘어가길 그토록 간절히 바랬는데
시들어가는 꽃처럼
사랑니 하나 썩은 것뿐이었다니

넌 지금도 유년의 골목으로 달려가고 있고
난 언제나 뒷걸음치며 내일로 향하고 있다

봄이니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니까
흑인과 천사를 섞어서 만든

빨강
노랑
파랑

그 경계에서 트럭은 달려온 길을
고양이 몸에 모두 새기고 전속력으로 떠났다
이런 게 모던 러브이고
감정의 패션이구나
살찐 테너는 뜬금없이 틀니를 뺐다 다시 끼우더니
이별의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커다란 사탕이 녹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진실


—《시와 반시》2016년 여름호




‘롤리팝’ 알사탕도 아니고 눈깔사탕도 아니고 ‘롤리팝’이다. 알사탕이나 눈깔사탕 또는 십리사탕이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라면 분명 ‘롤리팝’은 색다른 정서로 다가온다.

 
롤리팝의 실체는 회오리바람에 여러 색깔을 배배 꼬아 놓은 느낌의 막대사탕이다. 이 생소한 이름의 막대사탕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면서 평범한 것들을 배배 꼬아 놓은 느낌을 전달한다. 막대사탕을 잘 먹는 방법은 잘 빨아먹고 핥아먹는 것.


그럼 이 시를 읽는 독법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면서 조금씩 핥아먹으면 된다. 하지만 핥아먹으려고 해도 여전히 감각적이면서 난해하게 다가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 시를 읽어낼 열쇠로 찾아낸 것이 ‘모던 러브’ 이다.


“트럭과 고양이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면/이 달콤한 속도가 길을 분만한다면/그 길에서 살찐 테너가 매일 나에게 걸어와/삼십 년째 같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준다면”


트럭과 고양이의 사랑이라 너무 이질적인 동거 앞에서 사랑을 논해야 할지 아니면 관능을 논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지게 한다.

 
분명한 것은 트럭과 고양이의 사랑은 분명 이질적이다. 그런데 이 이질적인 동거는 다시금 단숨에 빠진 사랑답게 속도를 분만한다. 미처 소화되지 않은 속도는‘ 끼이익’하는 굉음과 동시에 살찐 테너를 불러내고 갑자기 불려나온 살찐 테너는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권태롭기까지 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준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이질적 만남과 사랑이라는 일상적 삶의 스토리와 닮아있다. 너무도 다른 속성의 두 사람이 만나 단숨에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매일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권태로움이 포착된다. 이것이 우리가 뜨거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평범한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가 태양을 녹일 듯이 뜨겁게 건너온 여름은 더 이상 색다를 것이 없는 나른한 일상이다.


“하품을 하던 하마가/하품 속으로 자신의 몸을 풍덩 빠뜨리듯/봄이 오고 마침내 오늘이 빨강, 노랑, 파랑/삼원색으로 나눠진다면”


‘하품을 하던 하마가 하품 속으로 자신의 몸을 풍덩 빠뜨리듯’ 주객이 전도 된 것 같은 뭔가 굉장히 신선한 역발상은 계절을 역행해서 여름에서 봄을 불러낸다. 그런데 그 봄은 빨강, 노랑, 파랑 색의 삼원색으로 분류된다.


빨강은 정열적인 사랑 또는 본능에 가깝다면 파랑은 낭만과 순수로 읽어낼 수 있다. 나머지 노랑은 뜨거운 태양의 상징이면서 현실이다. 즉 노랑은 빨강과 파랑을 녹여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화두인 셈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진실/하늘에서 커다란 사탕이 녹고 있다//만일과 어쩌면 사이로/떠오른 태양은/너무나 명백한 증거로 가득해서/태양이 아니라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지/견딜 수 없이 지루해진 우리는/우리의 자작극에 삶이 속아 넘어가길 그토록 간절히 바랬는데/시들어가는 꽃처럼/사랑니 하나 썩은 것뿐이었다니”


1연이 사랑 또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다면 2연은 1연의 이미지를 좀 더 구체화시켜서 형상화시켜준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진실’일 뿐인데, 안타깝게도 하늘에서 녹고 있는 커다란 사탕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너무도 명백한 증거들로 가득한 뜨거운 태양이다. 다만 우리는 이 명백한 태양 아래서 사랑이라는 자작극을 만들어서 그 자작극에 스스로 꼴딱 속아 넘어가서 살기를 간절히 바랬을 뿐인데.......


결국 우리의 자작극인 사랑은 시들해지고 입안 깊숙이에 있는 사랑니 하나 썩은 것뿐이라니.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다.


“넌 지금도 유년의 골목으로 달려가고 있고/난 언제나 뒷걸음치며 내일로 향하고 있다//봄이니까/입이 다물어지지 않으니까/흑인과 천사를 섞어서 만든”


그래도 어쩌랴. 넌 유년의 골목으로 난 내일로 우린 늘 이렇게 어긋나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랴 지금은 봄. 열린 입으로 흑인과 천사를 섞어서 만든 빨강, 노랑, 파랑


“그 경계에서 트럭은 달려온 길을/고양이 몸에 모두 새기고 전속력으로 떠났다/이런 게 모던 러브이고/감정의 패션이구나/살찐 테너는 뜬금없이 틀니를 뺐다 다시 끼우더니/이별의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했다”


레드와 블루의 경계에서 트럭은 달려온 길을/고양이 몸에 모두 새기고 전속력으로 떠났다. 결국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인가? 순수에서 관능으로 옮겨간 사랑은 결국 상처만 남기고 떠나는 것인가? 그럼 어떤 것이 사랑의 진실일까? 어떤 것이 삶의 본질일까? 결국 사랑과 삶에 대한 갈구는 감정의 트랜드를 따라가는 패션 정도인가?


결국 썩어서 빠져버린 사랑니 대신 틀니를 낀“살찐 테너는 뜬금없이 틀니를 뺐다 다시 끼우더니/ 이별의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한다. 새로운 일탈에 대한 도전은 살찐 테너가 불러주는 이별의 세레나데를 가만히 들어야하는 현실이란 말인가?


“하늘에서 커다란 사탕이 녹고 있다/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진실”


관습을 벗어던진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결국 현실 앞에서 녹아내리는 것.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알고 싶었던 것은 관습과 일상 속에 파묻혀 있는 ‘약간의 진실’이다. 기호와 상징 그 너머에서 오는 또 다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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