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7 김해
딱히 싫다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허술하나마 이 몸의 실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 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이들이 많은 요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요. 예전에는 기자가 사보나 PR 회사로 가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급여와 고용안정성은 보장되지만, 세상을 내 시각으로 보는 글쟁이가 아니라 남의 딸딸이를 대신 쳐주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제로 자기 시각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도저히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도 많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 옛말입니다. 어차피 이 지면은 클라이언트의 것이지만, 만드는 사람은 나니까 거기에 나만이 아는 사인을 집어넣을 수도 있는 것이죠.
것은 있습니다. 기업채널이나 보니 사람은 대상 혹은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즉 사보에 다루어지는 사람은 그 회사의 성격을 반영하는 일개인이지, 자연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일반 매체는 어찌 됐든 간에 사람을 담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죠. 어쩌다 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꺼내려고 하면 클라이언트 측에서 제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삶은 숨기려 한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느끼는 희노애락,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여러 사람사이에 상호작용할 때 일어나는 일들은 그 어떤 슬로건이나 로고로도 가려지지 않습니다.
특히 지역의 지사일수록 그 회사의 페르소나가 n명 모인 게 아니라 여러 다른 자연인들이 모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수도권보다 본사의 눈길이나 압박이 비교적 덜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앙에서 파견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이몽룡 성춘향도 남일 뿐이죠. 하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에서야 안 봐도 비디오죠. 결국은 현장에서 살 비빈 사람들끼리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가 사보를 맡고 있는 대형 유통그룹인 S그룹은 2016년 상반기 김해에 백화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통 유통기업들은 지역을 통째로 공략하는 경우가 많아서, 김해 전체에 그 회사 브랜드의 매장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입니다. 그래서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17일 김해여객터미널로 갔습니다.
사실 이날 정신이 없었는데요. 같은 기업에서 동대구역 인근에 짓고 있는 복합환승센터 쇼핑몰 현장을 오전에 들르는 강행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은 유독 추웠습니다. 대구 출신이어서 잘 알지만, 대구는 여름에 덥다고 겨울이 따뜻할 거라는 착각을 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겨울 기온은 거의 서울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 철골과 바닥만 시공돼 있는 건물 사이로 바람이 더욱 강하고 빠르게 불어서 완전히 냉장고 속에 있는 것 같더군요. 함께 간 포토그래퍼는 몇 번이나 카메라 부품을 떨어뜨릴 정도로 손이 곱기도 했고요.
그리고 나서 김해까지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낭패였습니다. 생각보다 동대구에서의 취재가 길어지면서, 김해까지 가는 기차 시간이 애매해졌기 때문인데요. 현장이 동대구역과 지척이기 때문에 12시 14분 열차를 타면 구포에 넉넉하게 도착해 돼지국밥 아니면 밀면을 먹을까 생각했는데, 그걸 놓친 게 타격이었습니다. 다음 차는 13시 34분이었어요. 여기서부터 난감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1호선 성당못 버스정류장에서는 김해 여객터미널까지 1시간 10분 정도지만 2시 20분에야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구 지리도 잘 모르는 포토그래퍼를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어요(포토그래퍼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보계 베테랑 중의 베테랑으로 이름만 대면 아실 만한 분입니다).
녹음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테이크로 수렴한다고. 결국 첫 선택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요. 다행히 부산 구포역에서 김해가 택시로 30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시간도 30분 정도가 남아서 우동이나마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습니다. 무궁화호로 동대구역에서 구포역으로 가는 게 1시간 15분 정도 걸리더군요. 무궁화호의 장점은 저렴한 가격 외에도 그 어느 열차보다 따뜻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창측은 열선이 차벽 아래로 지나가기 때문에 온기가 시종 올라오곤합니다. 벽도 없는 지상 9층 공사장에서 냉풍을 맞으며 기절의 위기를 넘기고 이런 따뜻한 기차에 몸을 실으니 눈이 감기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한참 지나 눈을 뜨니 이런 풍경이었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낙동강의 서쪽 길인데요. 바다를 등졌을 때 우안(右岸)을 따라 이어진 경부선 덕분에 볼 수 있는 풍경이죠. 부산의 서쪽에 있는 경남 양산시 물금면에 있는 물금역 인근입니다. 사실 바다 근처로 가면 바다보다도 많은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강입니다. 땅이 점점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시계가 갈수록 넓어지면서 초점을 둘 수가 없습니다. 안국를 잡아두는 근육이 이완되고 턱에 힘이 빠집니다. 눈을 뜨고 자는 기분입니다. 모든 하천들은 바다로 흘러듭니다만, 한국의 강줄기는 대부분 바다를 향해 주사기로 쏘는 그런 느낌입니다. 한강은 넓긴 한데, 그 인근이 군사지역이라 접근할 수 없는 정도 있고, 또 교량이 많은데다 강의 남북으로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서 정신을 놓을 틈이 없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김해와 부산이 맞닿은 이 서낙동강 하류만한 곳이 없습니다.
산이 낮은 동네는 해질 무렵 하늘의 색들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지면 가까이 사위어가며 들끓는 주황색과 그 위로 내려오는 푸르거나 검거나 한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색이라고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밝은 틈 같은 것.
한국에서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는 곳 중, 제가 좋아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이천 베어스파크, 호국원 인근, 남양주 수종사 인근 등인데요. 부산김해전철 대저역도 추가입니다. 이 날 포토그래퍼 실장님은 댁이 신사동이라 김해 여객터미널에서 고속터미널로 가시고, 저는 KTX로 이동했는데요. 김해여객터미널 맞은편 봉황역에서 구포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건진 한 컷입니다.
개인적으로 기타를 커스텀으로 제작한다면, 구름 없는 저녁하늘의 색으로 컬러를 맡기고 싶습니다. 물론 나뭇경이 보이는 투명 유광 도장으로.
곡 자체로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뮤직비디오 후반에 보이는 하늘 때문에 수천 번은 봤습니다. 지금도 가을,겨울에는 적어도 1주일에 한번 이상 찾아보는 비디오 클립입니다.
사실 일반 언론사나 잡지사의 취재는 그 자체가 즐겁습니다.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이라기보다 어떤 때는게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기사라는 게임 속에서 꽤 괜찮은 플레이어라는 생각도 들고요. 기사는 현실을 담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삶은 어쩌면 꿈 속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쪽이 더 행복하다는 것.
분명, 사보 취재 과정은 짓눌리는 일입니다. 시간과 약속, 사람과 사람의 관계,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금전 등 여러 겹의 어려움이 몸을 누르죠. 그런데 개인의 삶은 오히려 더 끈적하게 시간 위로 번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느꼈습니다. 일목요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생각들을 핥짝핥짝 핥는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