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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Oct 25. 2023

페라리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

언제나 남의 차, 그럼에도 모두의 차


페라리의 행사에 초대받거나, 시승차를 타는 일은 기자로서도 매우 귀한 경험이다. 아무 매체나 초대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주행 경험의 기회는 해당 기자의 운전 경력과 기사 생산 이력 등을 신뢰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제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 좋게도 페라리의 주요 행사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참가할 수 있었고 시승 행사도 두 번이나 초대받았다.


F8 스파이더 기반 원오프(단일생산) 모델 SP-8


그런데 이 페라리의 행사는 기자라는 직업을 참 작아지게 만든다. 다른 기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기자가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으로 차를 공부해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오너다. 페라리라는 차가 그렇다. 연구만으로 알 수 없고, 적어도 몇 달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낸 오너들에게만 보여주는 진짜 특징들이 있다.


포뮬러 원에서 유래한 기술, 언제나 트랙을 탐하는 이 괴물이 일상의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오너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게다가 페라리의 수많은 기능들은 개인화를 지향한다. 애초에 같은 모델이라는 개념이 드문 데다, 설령 동일한 모델이라 하더라도 워낙 많은 개인화 지원 기술이 들어가 있어 누가 타느냐에 따라 다른 차가 된다.


F8 스파이더 기반 원 오프 SP-8


그러니 애초에 페라리를 구입할 수 있는 오너들이라면, 기자가 전달하는 기사 따위는 그리 대단치 않게 다가올 정보다. 물론 세계적인 추앙을 받는 저널리스트가 오너들보다도 먼저 현장에 가서 첨단 신기술과 차량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급 정보는 여전히 오너들을 주 대상으로 나온다. 게다가 한국의 부자들은 정보력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오너들 간의 유대나 네트워크도 강하다. 기자들의 정보는 이들에 비하면 미미하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의 기사에서 약간이나마 도움을 받는 일반 대중들의 경우는 페라리를 구매할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시승차를 타 본 기자도 그냥 한 번 타 본 것뿐이지 별로 나을 바 없는 처지다. 물론 사기꾼과 다를 바 없는 정체불명의 ‘SNS 동기부여연설가’들은 ‘나는 페라리를 탈 수 없다는 그 생각이 잘못됐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여담인데, 페라리가 진정으로 고객의 격을 관리하고 페라리의 브랜드 가치를 생각한다면 돈의 출처부터가 페라리의 격에 맞지 않는 이런 족속들부터 끊어내야 할 것이다.


페라리 SP-8


이렇듯 페라리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철저히 남의 차다. 페라리 앞에 99.9%의 기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 페라리를 탈 수 없어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본업의 가치가 스스로 의심스럽기 때문에 헛헛한 기분을 참을 수 없다.


하지만 페라리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는 브랜드도 드물다. 페라리는 그런 면에서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차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몬자나 이몰라에서 벌어지는 포뮬러 원 경기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페라리를 연호하는 모두가 구매 가능한 고객이라서 거기 있는 건 아니다. 페라리라는 브랜드는 자동차를 넘어, 페라리가 존재했던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열정의 상징이다.

SP-8의 스케치



속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결국 시간을 따라잡고자 하는 욕구이며, 이는 곧 유한함을 잊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젠더 문제가 있지만, 아직도 페라리를 모는 멋진 미중년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조합이 먹히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


부자들은 그 대리 해결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페라리는 강력한 심장과 물리법칙의 한계에 도전하는 성능 완성도에 도전한다. 페라리의 원오프 모델이나 스페셜 모델인 XX 시리즈는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싶은 욕망 그 극단에 있는 모델이다. 물론 최근 수년간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포뮬러 원 머신은 진짜로 거꾸로 가는 경향이 좀 있긴 하지만.


2023 시즌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본선 죽쑤기를 반복하는 페라리 머신


이렇게 보면 페라리는 사실 철저히 남의 차이면서도 우리 모두의 차라는 역설이 잘 들어맞는다. 비유하자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이나 영웅 같은 존재다. 아무도 그들을 본 적 없고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세계인들이 아폴론이나 아프로디테를 남 같이 생각해 본 일이 없지 않은가. 2022년 초 한국자동차 기자협회 ‘올해의 자동차인’에 선정됐던 페라리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대행사 대표의 메시지가 문득 떠오른다. ‘언제나 남의 차였던 브랜드’라는 수식어는 기막히게 잘 맞는 것이었다. 물론 이어지는 말이 더 뜻있는 것이었으나, 마음에 꽂힌 문구가 너무 힘이 있었다.


페라리 로마 스파이더


그런 점에서 페라리는 존재 자체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인 브랜드다. 많은 자동차 제조사와 애프터마켓 브랜드는 페라리에 빚지고 있다. 페라리를 살 수 없는 범인(凡人) 중 한 사람인 기자가 페라리에 대해 글을 쓰는 방식은 크게 이 전제를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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