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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쓸모가 나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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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술꾼' 같은 작품은 누나에 집에서 배 깔고 하루 만에 쓴 것이다. 하, 내가 봐도 참 잘 썼더라고.

2013년 작고한 최인호 선생은 계간 <문학동네> 김영하와의 대담을 통해 이와 같이 언급했다. 이 말이 전혀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술꾼'이 써진 1970년 무렵 그의 물리적 필력에 있다. 당시의 그는 청탁받은 원고의 마감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출판사의 외고 담당자들이 그의 원고 속도를 조절하기 바쁜 지경이었다.


나는 쓰기라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을 두 사람으로 폰티오 빌라도와 최인호를 꼽고 싶다. 한 사람은 자기가 쓸 것을 썼다고 호언했고, 한 사람은 배를 깔고 원고지 80여 장에 해당하는 글을 거푸 쓰면서도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 둘 다 인류사에 종(種)적으로 드문 인간들이다.


11월 24일 자 KBS <TV, 책을 말하다>는 최인호 작가의 2주기 추모집인 [나는 나를 기억한다]를 다루었다. "좋은 문학은 사람을 쓰러뜨리고 일으켜주는데 최인호 선생의 문학은 쓰러뜨리는 데서 끝났다. 그래서 당시에는 다소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최인호 선생에 대한 과거 문단의 평을 인용한 출판 전문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가 인용한 이야기는 좋게 이야기하자면 문학의 효용론과 기능론이었겠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효용과 기능에 의거한 문학론에 다름 아니었다.


책이 죽은 시대라지만 모바일이 됐건 뭐가 됐건 간에 사람들에게 가장 견고하고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텍스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한 만큼 민감한 것이 텍스트다. 텍스트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텍스트 생산자를 둘러싼 분위기, 텍스트가 태어나는 환경에 가장 크게 영향 받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텍스트 생산자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무엇일까? 독재의 회귀? 각자도생의 당연화? 그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강박'일지도 모른다. 한국에는 어떤 직종에든 기능적 근면을 요하는 분위기가 있다. 요리사라면 열심히 칼질을 해야 하고, 정치인이라면 부지런히 헛소리일망정 말을 늘어놓아야 한다. 작가 역시도 뭔가 많은 텍스트를 생산해야 한다. 그가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쳤건 아니건 말이다. 실제 그렇지 않은 이들이 받는 벌이 망각이다. 망각, 강박. 요즘 말로 '라임(rhyme) 쩌는' 한 쌍이다.


강박은 어떤 일을 하건 그 주체가 되는 사람으로부터 활기를 탈색시켜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강박적인 사람의 텍스트에는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강박을 권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글의 구조는 기계적으로 맞물리고, 은연중 당위의 세계가 구축된다. 거기에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대고 목이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집중할 여유는 없다.


다른 플랫폼도 있지만 브런치에 나름의 둥지를 틀어보기로 한 것은, 이 공간이 그런 강박과 거리가 멀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 노출 빈도도 적고 알음알음으로 아는 상태라는 점도 있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인터페이스 자체가 '여유 날 때 쓰시오'라는 '기운이 온다.' 파워블로거 선정 방식에서부터 그 댓글들까지 오로지 효용과 기능으로 넘쳐나는 포털사이트 블로그에는 없는, 눈 감고 타자 치기 같은 편안함이 이곳에는 있다.


그간 말할 수 있는 플랫폼을 잃고, 필드로부터 축출당한 자로서, 간절히 그 플랫폼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간 내 글엔 나와 내 사고의 쓸모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하지만 뭐든 쓸모와 효용을 틀로 보는 데서 교과서 국정화 같은 발상도 나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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