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노동력 노령화의 부산물이지만 의외로 좋은 일자리
한국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미모의 여성 트럭커 즉 화물차 운전자는 세계 대중문화 속에서 꽤 인기 있는 스테레오타입입니다. 기원은 다양합니다. 북미의 경우 장거리 운행을 하는 트럭커들이 졸음을 쫓기 위해 섹시한 여성들의 사진을 앞유리에 꽂아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캐릭터 중의 하나가 글래머러스한 트럭커 걸이기도 합니다. 통상 점프 수트 안에 별다른 걸 입지 않고 있다거나 비키니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죠. 물론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대상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주로 등장하는 무대는 윤리의 강제력이 약한 서브컬처 영역입니다.
일본에서도 매력적인 여성 트럭커들이 등장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많습니다. 물론 서브컬처 계열이 주 무대긴 하죠. 형형색색의 등화류로 꾸민 트럭 ‘데코토라’, 혹은 트럭과 어울리지 않게 요란한 복장, 예컨대 공주님 복장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스프레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일본 여성 트럭커의 인터뷰를 다룬 기사>
https://www.vice.com/ko/article/wjw5a5/female-truck-driver-dekotora-japan-yukino-takanashi
놀랍게도 이게 현실을 베이스로 한 거라죠. 물론 ‘미모’는 현실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럭을 꾸민다거나 요란한 복장을입는 행위는 트럭커라는 직업의 본질과는 크게 상관 없는 장식 행위거든요. 즉 모델이나 연예인을 하려는 사람이나 그럴 자질이 있는 이들이 트럭커가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여성 트럭커는 있어도 ‘미모’의 여성 트럭커는 드문 게 당연합니다. 무라카미 류의 <스트레인지 데이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준코처럼, 영화배우로 만들고 싶을 만한 트럭커는 극히 드문 것이죠.
앞서 미국 이야기를 잠시 했지만, 직업 선택에 성 구분이 크게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여성 트럭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더 큽니다. 거친 일에 어울리는 기골 장대한 여걸들이 대부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조금 더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의 여성 트럭커 증가는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고령화의 산물로 해석되기때문입니다. 이미 2015년,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 내 여성 트럭커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고 유력 운송업체의 여성 운전사 비율이 10%를 넘게 됐다는 사실을보도한 바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는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의 영향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당시 인용한 일본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기준으로 이미 여성의 고용율이 67%에 달했다고 합니다. 2019년 총무성 자료에 따르면 71%에 달합니다. 세계은행 기준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580만 명이라고 하는데, 노동 가능인구는 5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임기 여성 1인당 출산율이 1.3명 내외로 한국보다 비교적 나은 사정임을 감안해도 이렇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령의 남성들이 주로 포진하고 있던 일자리에서 인력 이탈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신체 노동이 필요한 노동을 견딜 수 있던 노령남성들이, 그렇지 못한 초고령의 영역에 진입하며 자연스럽게 공백이 생기고 있죠. 운수업은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75세에 운전면허조차 자진반납할 것을권하는 사회 분위기인데 위험도가 높은 대형 화물차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노동력입니다.
하지만 고령화로 비는 일손이 화물차 운수업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여성들에게 화물 운수업이 각광받을까요?
여기엔 여타 선진국과 비교하면 심각한 수준인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가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한국이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닙니다만, 특히 출산 후 경력 단절로 인한 소득 감소가 심각합니다. 그나마 한국보다는 신생아 돌봄 공적 서비스가 괜찮은 편이고, 개개 국민들의 상승 욕구가 적어서 크게 수면 위로 문제화되지 않을 뿐입니다. 특히 대기업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습니다. 조사 대상 기업과 범위에 따라 다르지만 2020년 7월, 일본 도쿄 증권거래소 1부 상장기업 기준으로 7.1% 수준인데 사외이사를 제외한 내부 승진 사례는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한국보다는 사정이 조금나은 수준인데, ‘도긴개긴’입니다.
대기업의 사정이 이러한데 그 외의 경우에야 말할 나위가 없죠. 사실 일본 여성들이 결혼하면서 출산 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계약제 일자리로 옮깁니다. 다만 그런 일자리 자체가 많다 보니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취업률이 나오는 것이죠. 이런 일자리는 당연히 임금이 낮습니다.
그런데 화물운수업의 경우는 상당히 고수익 직종에 속합니다. 물론 초기 진입비용이 높고 체력적 부담이 많은 등 허들이 있으나, 2019년 기준 일본의 화물차운전자들의 연 평균 수입은 택시 운전기사보다도 100만 엔 높은 약 400만 엔대였습니다.
게다가 의외로 시간 활용이 유리하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화물운전자들의 일과는 비교적 규칙적인 편입니다. 건설현장에 필요한 자재를실어나르는 경우에는 새벽 4시~오후 3시, 아침 7시~오후 5시 정도의 간격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한국과도 비슷하죠. 요령만 익힌다면 적어도 오후 7시 이후의 시간이 자신의 것입니다. 사무직과 달리 추가적인 야근을 할 필요도 없고 수시로 울리는 상사의 카톡을 받을 필요도 없죠.
다행히 자동화되는 다양한 기능들은 대형 화물차 운전의 기능적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자동화된 다단 변속기와 각종 안전 장치는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습니다. 체력 차이는 고루한 고정관념일 뿐이란 것, 두말 하면 입 아프죠.
육아에도 다른 직종 대비 유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트레일러의 경우에는 운전석 뒤에 침대 공간이 확보돼 있습니다. 냉장고는 기본이죠. 주간에 아이를 돌보며 일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닌 상황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민간의 역량이 투입되는 모양새가 좋습니다. 기술적 장벽을 브랜드가 넘도록 도와주고 초기 진입 비용에 있어서도 도움을 준다면 여성들이 양질의 일자리에 보다 쉽게 진출할 수 있고, 산업 차원에서는 안정적으로 우수한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한국에서 볼보 트럭이 시범을 보였습니다. 여성 트럭 정비사 인력과 트럭 운전자 인력을 동시에 양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원자가 적지 않습니다. 트럭 운전자의 경우, 교육을 이수하면 향후 자사 트럭 구입 시 지원도 제공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국 역시 이 영역에서 남성들의 고령화가심하기 때문에, 일본처럼 여성 트럭커의 모습을 더욱 자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트럭 브랜드는 유저들의 충성도가 높은 편이라, 입문 이후 이탈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기업 차원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투자죠. 타 브랜드에서도 각기 제품 특색을 내세워 여성 트럭커와 고객 양성 및 유치를 전략적으로 진행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 일본의 사회 변화 진행 단계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령화 및 그에 따른 제반 현상의 경우 일본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항상 부수적인 효과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인구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라는 진단의 이면에는 여성 인력의 발굴 가능성 배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과할까요?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트럭커는 여성들에게 정말 좋은 직업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여성들에게 좋은 직업이결국 남성들에게도 행복한 일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