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핫 샷' 데뷔 스쿠데리아 페라리 올리버 베어먼을 보며
소년등과일불행 少年登科一不幸.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인생의 큰 불행 중 하나다라는 말입니다. 중국 송대의 학자 이천 정이(程頤, 1033년~1107년)의 이야기죠. 김훈 선생은 소설 <흑산>에서 이를 소년등고 少年登高로 바꿔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오만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쉽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결국 찬란한 성공이 무색할 정도의 실패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계의 의미로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 나이부터 성공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 그만큼 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경쟁에서 앞서나간다면 그만큼 실패를 하더라도 회복이 빠를 것이라는 논리적인 접근도 있죠. 아마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소년등과일불행 같은 말은 믿지 않을 것이고, 설령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이른 성공 자체가 하나의 후광효과가 되어 줄 것이라고 기대할 겁니다.
2024년 3월 10일, 만 18세의 영국인 포뮬러2(이하 F2) 드라이버인 올리버 베어먼(Oliver Bearman)은 경기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받았습니다. F1의 예선 마지막 주행에 투입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터스포츠에서 레이스가 있는 주 즉 레이스위크에는, 드라이버는 경기 일정에 맞춰 모든 일정을 조절합니다. 예민한 선수들은 그 루틴에 영향을 주는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v포뮬러원(이하 F1) 머신에 타고 레이스를 기회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두 드라이버 중 한 사람인 카를로스 사인츠 주니어가 충수염으로 입원한 것이었습니다.
올리버 베어먼은 2023년 F2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이런 깜짝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꿈의 무대인 F1 무대로 진출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보장돼 있는 드라이버라는 의미죠. 올해는 스쿠데리아 페라리와, 페라리 파워 유닛을 사용하는 하스(Haas)의 리저브 드라이버로 지명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기존 시트를 유지하는 두 명의 드라이버 중 공석이 나면 대체하는 역할이죠.
"긴장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에겐 말 그대로 폭풍 같던 하루였을 겁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SF-24 머신 38번 차량을 탄 그는 예선에서 11위를 차지했고 3월 11일 진행된 본선에서는 7위로 포인트 피니쉬를 이뤘습니다. 다른 레이스도 마찬가지지만 F1은 10위 이내의 선수들에게 포인트를 수여하는데 7위는 6포인트에 해당합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1포인트를 못 따는 드라이버도 있는데,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고 대타로 나선 신예 드라이버가 '턱걸이'도 아니고 7위라는 꽤 높은 순위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사우다아라비아 현지에서는 오히려 우승자이자 전년도, 전전년도 챔피언인 막스 페르스타펜(오라클 레드불, #1)보다 이 드라이버에게 관심이 몰리는 모양새였습니다. 막스 페르스타펜은 개막 후 2연속 폴 투 윈(예선 1위, 결승 1위)를 기록했는데, 워낙 지난 시즌 하반기부터 다른 드라이버들과 너무 큰 격차로 우승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의 우승이 이제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인 것이죠. 이런 절대 강자의 존재는 신규 팬들을 모으는 데는 좋지만 기존 모터스포츠 팬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잘하는 선수더러 살살 달리라고 할 수도 없죠. 다른 팀들의 머신 상태다 드라이버들이 그를 못 따라잡는 것이 문제일 뿐이죠.
그런데 스쿠데리아 페라리처럼 F1 최고의 명망과 전통을 자랑하는 팀에서 18세의 루키가 나와 포인트를 얻었으니 오랜만에 이야깃거리가 생긴 겁니다. 게다가 앳되지만 말끔하고 귀여운 외모까지 돋보인 데다, F1 의 선배 드라이버들이 모두 칭찬까지 해주니 기자들로서도 기사를 쓸 재미가 생겼겠죠. 매주 '막스 페르스타펜 폴 투 윈'을 반복해서 써야 한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겨우 7위인데도 'destroyed' 우리 식으로 하면 '찢었다'는 타이틀이 난무합니다.
F1 데뷔전에서 포인트를 딴 선수가 베어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많습니다. 하지만 영국인으로 한정하면 4번째고 그나마도 1968년 이후 처음이라고 합니다.
모터스포츠 언론, 심지어 선배들의 칭찬과 달리 본인 그리고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운영진들은 결과를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중하는 분위기입니다.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은 드라이버들이 막상 F1에 와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현재 하스의 케빈 마그누센은 2014년 데뷔전에서 2위를 기록했는데, 드라이버로 활약한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16위 정도를 오가는 성적입니다.
그만큼 폭망한 것은 아니지만 팀 선배이자 사우디아라비아 GP에서 3위를 기록한 샤를 르클레르(#16)도 기세가 시들합니다. 물론 그의 드라이빙에서의 문제는 온전히 그의 탓만이 아니라 머신 세팅에서의 문제가 누적된 것이어서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찌 됐건 자신감을 계속 잃어가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번 경기도 예선에서는 2위를 기록했는데 본선에서는 한 계단 미끄러졌고 결정적인 순간에 순위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포디움에서 샴페인 세리머니를 할 때도 그리 밝은 표정만은 아니네요.
"빨간 옷을 입고 빨간 차를 타고 F1에 데뷔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F1 데뷔를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카를로스 사인츠 주니어가 빨리 회복해서 좋은 경기를 보여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빨간 옷과 빨간 차란 재론의 여지 없이 페라리죠. 사실 2027년 이후라면 생각해 볼 만합니다. 루이스 해밀턴이 2025년부터 페라리에서 활약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는 소기의 목적(월드 챔피언)이나 그에 근접하는 결과를 이루면 은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채울 유망주가 필요하죠. 충분히 숙련된다면 베어먼이 22~23세 시즌에 안정적으로 풀 타임 F1 드라이버가 되는 커리어의 시작을 페라리에서 하지 말라는 법도 없죠.
그러나 F1 선수들은 엔트리에 올라가는 순간, 아니 그 징조가 보일 때부터 수많은 유혹이 오게 됩니다. 거액의 돈다발을 들고 오는 스폰서들도 적지 않죠. 그들은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멋모르고 그에 응했다가 레이스 판 전체에서 찍혀서 결국 기량의 퇴보로 이른 나이에 퇴출되다시피 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F1 드라이버 한 사람을 육성해내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본인으로서나 주변으로서나 큰 손해죠. 소년등과일불행이라는 말이 진짜 적용되는 판이 바로 이 모터스포츠입니다.
이른 성공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른 성공을 목표로 하면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성리학과 인연 없을 것 같은 이 젊은 영국인 드라이버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예외다,라는 말로 도외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