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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리사이클링 주제에, 하이엔드를 논한다고?

자동차부터 골프 의류까지

by 휠로그

재생용지 같은 생이라면

아무에게도, 이 잔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함성호 ‘타르쵸’ 중에서(⌜56억 7,000만 년의 고독⌟ , 문학과 지성사)



재생빨랫비누와 갱지, 재생용품의 기술적 한계


혹시 재활용 빨랫비누 보거나 사용해본 적 있으신가요? 폐식용유를 활용해서 만든, 거의 크기가 두부 한 모 만한 것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더러 나눠주는 곳이 많았습니다. 가게에서 파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 재활용 비누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물에 잘 녹지도 않고 세정력도 약한데 오래 가기만 했습니다. 다 써야 다른 비누라도 살 텐데 닳지 않다 보니 이걸로 빨래를 삶을 때 쓰는 정도가 그나마 생활의 지혜였달까요? 그런데 원료가 원료다 보니 냄새가 좀 역했습니다.



인용한 시에 나왔던 재생용지는 어떨까요? 혹시 학교 다닐 때 ‘갱지’라는 종이를 경험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당신은 확실히 밀레니얼은 아닌 겁니다, 신문지처럼 어두운 색의 이 종이는 무척 약했습니다. 그 위에 지우개질이라도 할라치면 종이가 찢어지거나 해졌습니다. 해지는 경우는 종잇가루가 지우개에 묻어나면서 지우개 자체도 못 쓰게 되고 종이에 구멍만 나곤 했습니다. 이 종이는 제가 2000년대 중반 군 생활을 할 때도 일부 오래 된 문서에서나 봤을 정도입니다.


이러다 보니 리사이클링 제품이란 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굳이 업사이클링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리사이클링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였죠.



기존 리사이클링을 ‘다운사이클링’으로 본

업사이클링의 개념


한국어로는 ‘새활용’이라는 절묘한 키워드로 번역된 업사이클링(upcycling)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중반에 등장했습니다. 독일의 디자이너 라이너 필츠는 수명을 다하거나 버려진 제품의 원형을 살려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업그레이드(upgrade)하는 새로운 재활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기존 재료를 부수거나 녹여 새로운 형태로 가공하는 것을 다운사이클링이라 보았고요. 환경을 위해서는 어찌 됐든 에너지를 쓰게 되는 다운사이클링보다 업사이클링 쪽이 더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이 업사이클링을 상업적으로 잘 구현해낸 브랜드가 있죠. 바로 프라이탁(Freitag)입니다. 방수포 천으로 만든 프라이탁 가방은 패션 아이템이 됐고, 한국에서도 한 때 홍대와 연남동 거리를 휩쓸었습니다. 참고로 스위스 취리히의 프라이탁 플래그십 스토어는 선박용 컨테이너를 업사이클링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분명 기존 업사이클링의 개념은 원래 제품의 형태를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최근 PET나 폐그물 등 해양 쓰레기의 물성을 해체해 재조직한 질료로 만든 자동차 내장재, 의류는 업사이클링일까요, 다운사이클링일까요? 사실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과정만 보면 요즘의 재활용 제품들은 다운사이클링에 가깝겠지만, 결과 즉 이 재활용을 통해 최종적으로 달성하려는 목표를 생각해 보면 업사이클링이 맞을 것입니다.




즉 소재를 재활용할 수 있게 가공하는 에너지가,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 대비 적다면 충분히 그것도 업사이클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라이너 필츠가 이야기한 업사이클링은 소재 재활용 기술의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것일 겁니다. 그 당시의 업사이클링 개념만을 보자면, 제품의 물리적 형태가 어느 정도 유지된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죠. 그러나 현재의 기술은 정말 재활용이 가능할까 싶은 상태로, 원래의 기능에서 멀어져 열화(degradation)가 진행된 소재를, 처음부터 신제품이었던 것 같은 상태의 제품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케 합니다.



업사이클에서 하이엔드 리사이클로?

자동차 골프 등 고급 제품들의 경우


상당히 비싼 재화인 자동차에도 이러한 재생 제품이 들어갑니다. 결코 저렴한 차도 아닙니다. 볼보의 최초 전용 플랫폼 전기차 C40 리차지의 바닥 소재, 기아EV9 등 꽤 이름값 있는 브랜드이거나 대중적 브랜드 중에서도 상위급 차종의 시트와 도어 트림 등에 업사이클링 제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볼보의 전기차 C40 리차지
C40 리차지에 적용된 업사이클링 내장재


특히 산업화 시대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탄받고 있는 자동차 기업들은 ‘결자해지’를 외치며 소재 업사이클링에 진심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해양에 널린 플라스틱 폐기물들을 수거해 재활용했을 때 자연이 흡수할 수 있는 탄소량이, 육상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거함으로써 구현되는 결과값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이 학문적으로 제기됐습니다. 바다가 흡수할 수 있는 탄소를 블루카본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프로세스는 아직도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 남았으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23년에 출시될 기아의 대형 전기 SUV EV9의 실내 소재도 해양 플라스틱과 폐어망 재생제품이다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고가 재화에 재생 소재를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환경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는 재화를 구매하면서까지 이에 연연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PR이나 마케팅에서는 대중 브랜드를 기준으로 2배 이상 가격을 프리미엄, 5배 이상 가격을 럭셔리 브랜드라 보는데 럭셔리급의 제품을 사면서 대중 브랜드 제품에 들어갈 만한 소재의 제품을 사야겠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해는 할 만합니다.


하지만 럭셔리브랜드들도 생존을 위해 업사이클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경영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빠르게 자리잡아가는 상황에서, 이를 외면하는 충성 고객의 지지만으로는 미래를 열어가기가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상대적으로 많은 인력으로 소재 연구를 할 수 있는 대자본 대중브랜드들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재생 소재 자체의 고급화를 통해 하이엔드 리사이클이라는 트렌드를 제시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시장으로의 퀀텀 점프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기존 브랜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너무 강한 경우, 자사 출신의 스타급 인력들을 독립시키거나 외부의 창의적 인력과 협업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기도 하죠.


골프웨어만 봐도 이런 흐름이 보입니다.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그레이고(대표 이준호)가 런칭한고스피어(GOSPHERES), 골프 선수 출신 대표가 운영하는 쿨베어스의 에이븐(AVEN) 등이 대표적입니다. 삼성 패션디자인펀드(SFDF) 2년 연속 수상자이자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손상락, 강혁이 전 라인의 디자인과 브랜딩을 진두지휘했고, 현빈, 장원영 등을 브랜드 앰배서더로 내세워 단숨에 인지도를 끌어올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에이븐의 경우는 고스피어처럼 셀럽 마케팅을 진행하지는 않지만 비즈니스룩을 겸할 수 있는 비즈레저 룩을 앞세워 하이엔드 리사이클 의류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브 장원영을 브랜드 앰배서더로 발탁한 하이엔드 업사이클링 골프웨어 브랜드 고스피어

하이엔드 영역은 자신감을 넘어 배짱 싸움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맡기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비쌉니다. 가격 책정에서 시장의 눈치를 덜 보는 편입니다. 합리적이라 쓰고 어정쩡이라 읽는 가격으로는 오히려 정체성을 확보하기도 어렵고 핵심 고객들에게 어필하지도 못합니다. 단순히 소재만이 아니라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도 값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비싼 가격을 매기는 게 하이엔드 마케팅입니다.



에이븐의 S/S 룩북


고스피어는 블랙홀에 빠져들기 전 마지막 기회를, 에이븐은 일정 이상 지구 온도가 오르면 피지 못하는 알래스카의 꽃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환경과 양립할 수 있는 하이엔드라는 그 가치 자체가 럭셔리의 자격이라는 게 이 시대의 조건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가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린 워싱의 혐의를 넘어서려는 노력


2021년 9월 런던 패션 위크에서는 ‘패션스케이프 : 순환경제(Fashionscapes: A Circular Economy)’라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아프리카 빈국의 가나에, 기부를 빙자에 투기된 헌옷들이 어떤 참상을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죠.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저렴한 개발도상국가 노동력을 착취해 만든 옷이 다시 빈국의 시장으로 가는데, 원래부터 품질이 좋지는 않았던 옷들이라 재활용의 의미가 없이 버려지고 결국 그 지역의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해 7월 1일, KBS 환경스페셜은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 내가 버린 옷의 민낯’ 편에서 같은 문제를 다뤘습니다. 친환경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원가 절감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20세기적 속셈을 숨긴 ‘그린 워싱(Green Washing)’을 꼬집는 내용입니다.




이에 비해 하이엔드 업사이클링이라는 트렌드는 적어도 그린 워싱과는 일차적으로 차이가 있는 프로세스처럼 보입니다. 해양 플라스틱을 재가공한 자동차 시트와 골프웨어의 특수 원사는 그 자체로 보면 훌륭한 업사이클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페라리나 마세라티 같은 브랜드도 더 이상 최고급 가죽을 얻기 위한 소 사육과 도축을 자랑스러워하진 못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의심해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세계적으로 산업의 동력은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원재료 가격은 오르고, 핵심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강대국 간 극한 대립으로 인해 원료 공급 체인은 이미 손상됐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재료의 물성이 가진 퀄리티만 확보할 수 있다면 업사이클링은 훌륭한 전략입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글로벌 브랜드와 기업들이 언젠가 이 불편하고 귀찮은 ESG에 질렸을 때, 반사적으로 과거의 파괴적 이윤 추구로 돌아가는 탄력이 너무 강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자동차 연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발전에 필요한 가스와 석유 공급이 차질을 빚자 2030년대 중반까지 내연기관차 생산 자체를 금지하자던 유럽 각국의 정부와 기업들은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올가미를 후발 주자들에게만 씌우고 자기들은 빠져나올지에 골몰하는 모습이 너무도 빤히 보여 역겹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이엔드라는 가치로 업사이클링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선망의 가치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당장 저부터도 고스피어나 에이븐의 옷을 살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적인 흐름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재생용지 같은 이 옷들을 감히 권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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