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 무섭단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저는 자동차 기자 혹은 에디터입니다. 유명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 꽤 쓸모는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돈을 벌진 않지만 회사에 소속된 회사에 고정된 수입을 올려줄 수 있었고, 그러고도 남으면 개별 의뢰를 받아 콘텐츠를 진행할 정도는 됩니다. 모빌리티, 스포츠(골프 부문), 대중음악 부문 의뢰 환영합니다.
한국은 가히 전문가의 나라입니다. 어떤 분야든,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탑 레벨급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강남 바닥을 오 분 만 걸어다녀도 널렸습니다. 자동차 영역도 그렇습니다.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학구파부터 경험을 통해 벼려진 날카로운 직관의 소유자, 커뮤니케이션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쓰고 술이 센 사람-까지 다양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동차라는 물건에 대해 전하는데 그 정보의 양은 깊이와 폭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제가 그래도 차별화되고 자신 있는 것은 브랜드 스토리텔링입니다. 정확히는 브랜드 브랜딩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 스토리텔링은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핵심 고객군이 관심 갖는 이야기에 실어내는 것이죠. 브랜드 브랜딩을 그걸 포함하거나 넘어서는 브랜드 자체의 콘텐츠화입니다. 제품에 대한 브랜딩과 브랜드에 대한 브랜딩은 사실 방향과 주제가 약간 다릅니다. 전자가 제품을 포괄하기는 하지만 기업 차원에서 콘텐츠를 내보낼 때 두 가지 이야기는 구분되기를 원합니다. 발주의 항목이 다르기 때문에 업무가 내용적으로 구분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브랜드 브랜딩에 대한 니즈가 강한 기업 혹은 해당 기업의 브랜드 브랜딩 니즈가 강해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고 경험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선 브랜드의 자산이나 글로벌 평가에 비해 특정 시장에서 인지도가 약한 경우, 고집하는 경우가 너무 뚜렷해 트렌드 변화 속도와 조금 맞지 않은 경우.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핵심 기술에서 차별화가 이뤄져 있지만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선에서는 격차가 사라진 경우. 보통 글로벌 브랜드 중 소비재, 내구재를 다루는 기업들 중이 이런 사례가 더러 있습니다.
이쪽에 꽤 자신을 갖게 된 것은 2017년부터 한 일본 자동차 브랜드 콘텐츠들을 제작하고 운영하는 것을 맡게 되면서였습니다. 이 브랜드는 브랜딩을 강화해야 하는 위 조건들에 부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주행 기본 성능은 물론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압도적 연비, 크기 대비 우수한 공간성이 장점인 이 브랜드는 십 년 전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 최고의 위치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국산차들이 이런 열세점을 IT 기술에 기반한 편의 사양의 우위점으로 어필하는 한편, 빠른 신차 출시로 약점이던 내구성과 잔고장을 덮어나가며 적어도 국내 시장에서는 '국산차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 브랜드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이 억울했던 겁니다.
적어도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브랜드의 니즈를 만족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표 획득에 있어서는 포털의 노출 정책 영향에 따라 약간의 부침은 있었으나 여전히 이 브랜드는 다른 방식으로 제게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크게 유명하지 않은 제게 일을 맡기고 있을까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브랜드 브랜딩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거나, 자동차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서 어려워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구조건도 일견 까다로웠습니다. 직접 차에 대한 이야기는 덜 하면서 그 브랜드의 핵심 기술력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담겨있는 브랜드의 가치와 미래비전, 창업주의 정신을 연결시킨 내용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자칫 사내보의 톤 앤 매너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오덕형 피처'로 보이기도 원했죠.
제겐 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 브랜드 창업주의 이야기에 원래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최신 차량에조차 창업주의 기본 가치가 '번역'되어 녹아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배경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제 이력과 적성이 도움이 됐지 않을까 합니다. 대학원 시절, 필연적으로 일본 쪽의 사료(史料)를 볼 일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사료 특징은 단연 훌륭한 보존 상태와 상세한 기록입니다. 언제 어느 시점에서는 과거의 특정 시점을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들이죠. 현재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때 언제든 오래 된 미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어떤 일을 하든 일본인들의 기본 스탠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게 오래 일을 맡겨 온 그 브랜드 역시 그런 면에 충실했습니다. 이 브랜드는 영문과 일문 두 가지 방식으로 과거 창업 때부터의 자료를 아카이빙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된 자료라도 뒤져 볼 의지만 있다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외국어 특히 동일한 내용을 다른 키워드로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의 어휘력은 기본이 돼야 합니다. 동일한 개념을 일본어로 지칭하는 것과 영문으로 지칭하는 것 한국어로 지칭하는 방식의 차이도 알고 있어야 하죠.
일본의 자료들은 찾으면 찾을수록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이퍼링크라는 개념이 있기 전에 이미 서지 자료 사이에 링크라 할 수 있는 개념이 적용돼 있는 게 일본의 아카이빙입니다. 그걸 따라가면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던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의 정보와 만나게 됩니다. 찾아본 사람이 별로 없는 정보를 보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그 때에 당도한 것마냥 설렙니다. 타임슬립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죠. 동 업종의 국내 브랜드들이 과거 자료를 자꾸 숨기기만 하는 것과는 대조됩니다.
최근 이 브랜드가 자사의 성장기를 다룬 만화를 한글판 유튜브로 로컬라이제이션하는 번역을 제게 맡겼습니다.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번역가들도 있는데 어째서 일본어능력시험 시절의 2급에 해당하는 제게 맡겼을까? 사실 번역가들이 이런 경우는 매우 어려워합니다. 맥락을 알 수 없고 맥락을 이루는 정보들에 대해서도 아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당 브랜드의 스토리를 번역하면서, 일본 자동차 매체에서도 잘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파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더 조사해본 그 1960~1980년대 일본에서 그 브랜드의 모습, 세계 시장에서 해당 브랜드의 성장기 등을 생생하게 다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 자의적이지만 브랜드 브랜딩 콘텐츠에는 3가지 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랜드의 설립 이념, 미래비전과 메시지, 고객들의 관심사죠. 좋은 브랜딩 콘텐츠는 3가지가 균형잡힌 것일 터입니다. 하지만 저는 과감히 브랜드 설립 이념에 무게 중심을 두었습니다.
즉 브랜드의 입장에 한 번 몰입돼 보자. 어느 브랜드의 콘텐츠를 만들 때든 동일할 수는 없겠으나 이 브랜드 설립 이념을 잘 이해하면 미래를 향한 의지는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포를 쏜 자리에서 포가 놓인 방식과 각도 등을 계산하면 어디에 탄이 떨어질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고객은 설립 당시 브랜드의 거울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시장 속에서 태어나니, 결국 브랜드의 핵심 메시지 속에 고객은 정의돼 있다는 겁니다.
이 브랜드의 사시(社是)는 좋은 제품을 좋은 가격에 팔고, 그걸 산 사람들이 올바로 쓰는 방법까지 익힐 기회를 주고 그 제품으로 인해 고객들의 삶이 재미있게 하자는 내용입니다. 이대로만 되면 이 기업의 제품에 연계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브랜드가 어떤 최신의 트렌드를 기반으로 소통하고자 하더라도 해당 브랜드의 창업주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오히려 강조했습니다. 가식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브랜드의 가치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모든 브랜드에서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창업주 중에는 업적에 비해 그늘이 너무 짙은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브랜드는 창업주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기술에만 몰두했던 사람이기에 그런 위험이 적었습니다. 드문 인물이죠.
하지만 그늘이 많은 창업주나 고위 관계자라 하더라도 그가 가진 경영 철학 중 성과로 연결되었던 것 그래서 사회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던 부분을 먼저 보면 브랜드의 핵심과 닿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겉핥기가 아니라 그 인물의 전기를 쓸 정도의 데이터가 필요하죠.
저는 이 브랜드의 브랜딩 콘텐츠를 만들면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50년 후에 누가 이 브랜드의 한글 결과물을 찾아봤을 때, 이 브랜드의 가치와 함께 이를 기록한 사람이 이런 마음으로 했겠구나 하는 것을 아주 희미하게만 느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겠습니다. 욕심이 너무 적거나 위선적이라고요? 이미 그에 대한 인정은 입금으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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