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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Oct 19. 2022

좋아해주지 못해 미안해! 파리

4년만의 파리모터쇼를 앞두고

10월 17일은 4년 만에 열리는 파리모터쇼(Mondial de L'automobile)의 미디어 데이였습니다. 저는 2018년 출장으로 참석해봤죠. 파리모터쇼는 뮌헨으로 옮긴 독일 IAA(그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제네바 모터쇼, 북미오토쇼 등과 함께 세계 4대 모터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4월의 뉴욕 오토쇼나 하반기의 시카고 오토쇼도 국제적인 자동차 전시기인 하지만 자동차 산업 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이 네 개 모터쇼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죠. 특히 파리모터쇼는 2018년 기준으로 120년째를 맞은 해여서 더욱 특별했습니다. 그 특별한 모터쇼에 갔다가 피고생을 한 이야기입니다. 



나도 한때는 파리병 환자였다


파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1970년대에는 파리에 대한 동경과 직접 경험해본 파리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증후군(Paris Syndrome)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까지 했었고, 라르크 앙 시엘의 보컬리스트 하이도는 프랑스인 1/4 혼혈이라는 정체성이 일종의 신비감으로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많은 드라마에서는 프랑스와 연결고리를 가진 특별한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국인들도 파리를 좋아하죠. 특히 젊은 여성분들에게 여행하고 싶은 도시 첫 번째로 꼽힐 겁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갤럽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참여자의 11%가 파리를 가장 우선순위로 꼽았다고 하네요. 저 역시 파리모터쇼에 참석하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특히 저는 푸조 자동차를 오래 탔는데요. 타면 탈수록 견고한 주행 안정성과 내구성, 우수한 연비, 실용성, 디자인 등 오랜 역사를 통해 다져진 기본기와 첨단 가치에 반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도시, 그런 도시를 만든 사람들의 차를 현장에서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죠. 게다가 구 PSA 그룹의 네이버 공식포스트 콘텐츠를 상당히 오래 담당하면서 더욱 프랑스에 대한 애정도 컸습니다. 



그런 와중에 취재 명분으로 기회가 생긴 겁니다. 흔하디 흔한 모터쇼지만 2018년은 120주년 그리고 시트로엥 99주년이라는 명분이 있었죠. 그래서 제안을 제출하고 조율을 통해 약간의 협조를 얻어 파리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실제 취재는 1박 2일이었고 나머지는 휴가를 붙인 여행이었습니다. 자동차 외에도 건축을 좋아하는 저는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를 직접 보고, 16구 특유의 오스만 식 아파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마냥 설렜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는 곳마다 글로벌 상업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브랜드 본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실천했죠. 빌라 사보아도 봤고 로레알 본사 바로 옆 숙소에서 자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라이더컵 선수단이 묵었던 하얏트리젠시에서도 1박을 했죠. 


모든 것이 순탄하고 즐거울 것만 같던 취재 겸 휴가는 갑자기 균열을 내며 어그러지고 마는데요. 



파리에서 응급실 구경을 할 줄이야


모터쇼 프레스데이는 무척 이른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신차 발표 및 브랜드 비전 발표, 포토세션 등으로 구성되는데, 당시 가장 먼저 시작하는 브랜드가 7시였습니다. 조금 선선한 새벽이었는데, 저는 행사장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뫼동 지역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숙소에서 나오기 직전부터 그런 상태가 지속돼서 화장실도 꽤 자주 드나들었죠. 배는 심하게 아프지만 설사가 나오거나 하진 않아서 버틸 만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남의 나라에서 대한민국 망신을 시킬 순 없지 않은가 해서 확인에 확인을 더 했죠. 


콜라를 한 캔 마시자 잠시 괜찮아지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어 센터에 짐을 풀어놓고 카메라를 들고 이동을 시작했죠. 첫 번째가 아마 메르세데스 벤츠였나 그랬습니다. 지금 포켓 로켓이라 불리는 AMG A의 하위 버전 35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요, EQ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날 목적은 공격적인 전동화 비전을 내세운 푸조의 하이브리드 라인업들이었죠. 특히 높은 확률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푸조나 르노 부스를 찾을 것으로 생각돼 단단히 준비와 기대를 했습니다. 푸조의 미디어 행사는 오후였습니다. 


그런데 오전 8시가 되자 갑자기 서 있지도 못할 정도의 현기증과 메슥거림이 다시 찾아왔고, 배도 아팠습니다. 황급히 화장실에 들렀지만 여전히 나오는 것 없었고요. 주변에서 왜 그러냐고,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고 친절하게 물어봐줘서, 저는 대충 체했다고 프랑스어를 잘 하는 일본인 기자에게 일본어로 전했습니다. 일본 기자들이 제게 알려주기를, 프랑스에서는 가장 부지런한 직업이 약사고, 가장 먼저 열어 늦게 닫는 가게도 약국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사인 저는 그 와중에 뭔가 뿌듯...은 개뿔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정말 약국이 많더군요. 저는 아무 곳에나 들어갔고 영어로 증상을 설명했습니다. 역시 엘리트들이더군요. 프랑스인들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하는데 이들은 정말 영어가 자연스러웠고, 저를 일본인으로 알았는지 일본어도 유창하게 했습니다. 


여튼 그래서 얻은 약이 프랑스 국민 소화제라는 '씨트하 투 드 베텡(Citrate te de Betaine)'이었습니다. 발포제로 물에 타 한 컵을 마시라고, 약사님이 친절하게 안내해주더군요. 외국에선 'I'도 'E'가 되는 마법에 걸리는지, '우리 아버지도 한국에서 약사다, 한국에 혹시라도 와서 어려우면 도움 받을 거다'라며 되지도 않은 사해동포주의적 오지랖을, 제 한 몸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부리고 있었습니다. 주접이었죠. 



그러고 들어가서 아우디, 재규어랜드로버, 렉서스 등의 미디어 간담회를 소화하고 있는데, 이 약을 먹고 잠시 좋아진 줄 알았던 속이 다시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죠. 저는 더럭 겁이 났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했을 때 높은 확률로 장염이었거든요. 프랑스의 일반 병원 치료가 쉽지 않다고 해서 더욱 겁났습니다. 


해서 대사관에 급히 전화를 걸었죠. 그런데 이게 한국으로 연결되더라고요. 나중에 전화요금 옴팡지게 나올 걸 알았지만, 뭐 어쩝니까. 살고 봐야지. 그래서 대사관 한국 직원분에게 '죽겠다, 살려달라, 똥싸서 나라망신 시킬 순 없지 않냐'고 했더니 '15구면 조르주 퐁피두 오삐딸만 찾으라'고 했습니다. 들어는 봤던 병원이었는데요. 워낙 뭐든 보기만 하면 '세계 최초의' 이런 수식어가 많은 파리인데, 인공 심장을 최초로 이식한 병원이더군요. 아, 여기서 패혈증으로 죽진 않겠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일반 병실 진료로는 별로 기대할 만한 효과가 없을 수 있으니 무조건 응급실 데려다 달라고 뒹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프레스라는 직함이 외국에서는 굉장히 신뢰도가 있다는 걸 거기서 알았습니다. 미국보다도 동양인에 대한 이질감이나 차별이 심하다는 유럽인데, 정신없는 와중 목에 그대로 달고 나온 파리모터쇼 '프레스' 명찰 덕분에 병원에서는 '프레쎄' '쥐르날리스떼' 하면서 조금 대우가 달랐습니다. 니콘 D5 카메라도 한 몫했죠. 뒹굴 필요도 없이 '이머전시' 한 마디에 간호사 두 분이 저를 부축해 응급 진료센터로 데려다주었습니다. 


키가 185cm나 되시는 동유럽 출신의 여의사 선생님은 '동양 남자에게 링거를 처방해본 적이 없어 어느 정도 용량일지를 모르겠다, 일단 배운 대로 처방하는데 힘들 수도 있다'며 수액을 처방해줬습니다. 과연 약이 들어가는 동안 죽겠더군요. 통상 동양인 남성에게 투약할 때는 백인 남성에게 필요한 약 용량의 80% 정도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초한 화, 욕심이 문제였다


항상 문제는 사람의 욕심이죠. 사실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소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초한 피로였죠. 4박 5일 일정 동안에, 같은 숙소에서 뻐기는 건 재미없다면 매일 숙소를 옮기다 보니, 무거운 짐들을 일정 중 내내 들고 다니는 꼴이 됐습니다. 카메라에, 옷가방에, 혹시 모를 테러를 대비해 안에 입은 보호대 같은 것들이 모두 짐이 됐죠. 그래도 힘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점점 스태미너가 떨어지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밥은 꽤 많이 먹었습니다. 원래도 빵이나 파이 등 프랑스 음식은 좋아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몰랐던 게, 이 프랑스 음식에는 '국물' 종류가 드물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국물 없이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제 몸이 결국 탈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먹는 것이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쌓였던 것이죠.


게다가 파리가 볼 것은 왜 그렇게 많던지요. 쓸데없는 잡지식이 많다 보니 보이는 것도 많았습니다. 생 라자르 역을 못 지나치고는 내려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 찍은 자리를 기어코 보겠다고 덤볐고 샹젤리제 거리에서의 피자를 먹겠다고 덤볐습니다. 까웨(K-Way) 현지 매장을 찾아보겠다고 정 반대방향으로도 갔었죠. 사실 제 몸이 단시간에 체력을 쓰는 데는 익숙해도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익숙지 않았는데, 그걸 무시했으니 몸이 반항을 한 겁니다. 



파리는 죄가 없는데, 좋아해주지 못해 미안해


그러고 나니 다른 것들이 짜증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위생적인 주제에 줄은 늘어섰고 돈도 내야 하는 공중화장실, 지린내가 진동하는 전철역 플랫폼 등이 모두 비위를 건드렸습니다. 그래도 프레스데이 둘째 날은 좀 살만 해져서 주섬주섬 챙겨 취재를 했습니다. 어차피 돌아오는 비행기가 이 날이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목 디스크 기가 있다 보니 귀국 비행기까지 이코노미로 갈 엄두가 안났습니다. 글로벌 제조사들은 원칙이 분명해서 기자를 지원하더라도 8시간 이내 비행 시 이코노미, 그 이상에만 비즈니스라는 방식이죠. 하지만 전 이미 지칠 대로 지쳤던 터라, 제 사비를 주고 좌석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그리고 기내식 한 번 먹지 않고 인천공항에서 눈을 떴습니다. 



사실 이 때의 파리를 생각하면 상반된 감정이 듭니다. 불편함을 못 견디는 나 같은 사람에게 좋은 여행지는 아니니, 돈 주고는 가고 싶지 않다면서도 책과 취재 자료로 본 것 이상의 볼거리와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언젠가는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결국 2019년에 매우 급하게 출장길에 오르게 됩니다. 시트로엥 창립 100주년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나마 이 때는 고생을 좀 덜 했습니다. 


저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에서 죽지 않으려고 최소한 말 몇 마디는 외워 가려고 하는 편입니다. 더군다나 파리는 도시가 도시다 보니까... 고층의 바에서 'Voulez vous coucher avec moir, ce soir?' 한 번 써먹어볼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상상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두 번째 출장에서는 파리 현지인들에게 고마웠습니다. 제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상당수가 한국어로 조금씩 도움을 건네려고 하더군요. 특히 샤를 드 골 공항 근처 호텔 직원들은 BTS 때문인지 한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더군요.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2020년의 파리모터쇼는 건너뛰게 됐네요. 2022년 파리모터쇼가 4년만이라고 하지만 실제 건너뛴 건 1회차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도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국가지만 많은 사람들이 폐쇄를 택하기보다는 공존을 통해 병을 이겨나가려고 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니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여러모로 유럽 여행은 쉽지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터쇼는 전쟁 기간 중에도 희망을 주는 스포츠 행사와도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자동차 한 대가 만들어지는 데만 해도 여러 나라의 기술력이 종합적으로 적용됩니다. 국가 명분의 영역을 넘어선 자본주의 국가 구성원들 간의 멋진 이해가 쇼를 빛내줍니다.


어찌 됐든 저는 당분간 파리에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체력 싸움인 도시예요. 하지만 최소 비즈니스석 이상만 확보되고 짐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 지혜만 제게 생긴다면, 한편으로는 다시 가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때는 좋아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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