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기자의 연예수첩 11
정말 다행스럽게도 요즘의 배 감독은 별 일없이 괜찮아 보인다. 얼마전 EBS가 방영한 한국 영화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건강한 모습의 배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활동하던 전성기를 즐겁게 회고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구나 비우면 채워야 하고, 가득 채우면 비워야 한다.
만약 채우지 않고 계속 비워내며 긁어내기만 하면 이른바 '번 아웃'(Burn Out) 증상을 겪게 된다.
반대로 넘칠 만큼 가득 채웠는데 비우질 못하면 터져버리고 만다. 과다 충전된 휴대전화 배터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배 감독의 판단력에 잠시나마 문제가 생겼던 이유도 비우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가득 채웠지만 비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먼 길을 걸어 이제는 정말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생겼는데, 정작 대중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다면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은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물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사회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력과 자기 개발을 등한시하는 자에게 사회가 끊임없이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나이를 먹어 한 물 갔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시작이 좋지 않으면 끝도 좋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추측만으로 넘어졌다 일어선 이들에게 손 한번 내밀지 않는 사회는 비정하기 짝이 없다.
최근 코로나19 영향으로 대기업 취업의 문이 갈수록 좁아지는 추세다. 여러 대기업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뽑는 대규모 공채 대신, 불황 대비책을 겸해 연중 상시 채용으로 눈을 돌리는 중이란다.
말이 좋아 연중 상시 채용이지, 인건비 상승을 우려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뽑거나 아예 안 뽑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 때문인지 숨이 턱밑까지 차 오른 취업 준비생들이 대거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확실한 정년 보장 등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대기업에 비해 응시 나이 제한이 까다롭지 않다는 점이 공무원 취업의 매력 포인트인 듯싶다. 달리 해석하면 응시 나이 제한이 덜 까다로우므로 이런저런 실패와 실수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거치고 나서도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공무원 취업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다. 오해 없길 바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문호를 넓혀 보다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아 보여 사례로 들었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미래 사회를 설명할 때 항상 언급되는 단어가 '비대면'이다. 앞으로는 대부분의 노동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므로 결과가 더욱 중시될 것이라고 한다.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노동일수록 시도와 과정의 의미 유무보다는 결과의 완성도를 따지게 되는 반면, 실패나 실수로 얻어지는 긍정적인 가치의 중요성은 낮아진다는 얘기. 쉽게 말해 패자 부활이 가능한 삼세판은 줄어들고, 단판 승부 위주의 사회로 변해갈 것이란 전망이다.
잘못 들어선 길을 되돌아오든 아니면 누구도 안 가본 길을 가기 위해 출발선에 다시 섰든 누구에게나 도전의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살 만한 세상이다.
이를 위해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길게 보는 여유를 가져야 할 듯 싶다. 이제까지 '빨리 빨리'가 최고의 미덕이자 장점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천천히 쉬어가거나 돌아가도 손해 보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해 어느 분야 할 것없이 늦깎이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얘기했던 고교 동창 녀석이 언제가 되더라도 영화 감독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데뷔하는 게 낫다며 빠른 데뷔를 독려했던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환갑이면 어떻고 칠순이면 어떻겠는가! 백발이 성성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떠 올릴 때 가슴이 설레고, 가슴 설레는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