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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준 Jul 31. 2020

흠결 없는 인생, 어디 있을까마는... 3

조 기자의 연예수첩 28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얘기하다 '엠마뉴엘'을 거쳐 '애마부인'과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까지, 곁길로 너무 나갔다. 


그럼 곁길로 왜 샜냐고? 큰길로 돌아가기를 무의식적으로 기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누구의 판단과 주장도 옳다고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 하지만 에둘러 '그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다'는 식의 양비론은 정말로 피해 가고 싶은 요즘, 다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빙빙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강했다. 주제로 다가서길 꺼려한 진짜 속내다.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유명인들 주변에서 성(性)과 관련된 추문이 들려오면 꽤 당혹스럽다. 특히나 고결하고 정갈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어왔던 누군가의 벨트 아래 감쳐줬던 진실이 뜬금없이 공개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사례를 통해 앞서도 한 차례 다뤘던 적이 있으므로, 마냥 당혹스러워하며 돌아가려 하기보다는 쏟아지는 빗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듯싶다.


업적과 과실은 별개의 관계다. 업적이 많으면 과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반대로 과실이 넘친다고 해서 업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즉 '상쇄'의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솔직히 잘한 일 열 개가 못한 일 한 개로 인해 빛이 바랠 순 있다. 그렇다고 잘한 일 열 개가 모두 사라지진 않는 것처럼, 업적과 과실은 서로에게 영향은 미칠 수 있어도 존재 유무를 결코 좌우하진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면 베르톨루치 감독과 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촬영 당시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서로 주고받았던 성적 학대 사실을 뒤늦게 털어놓았다고 해서, 작품이 이제까지 지녀왔던 예술적 가치와 성취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극 중 인종 차별적인 시각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받아왔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최근 흑인 사망과 관련해 벌어졌던 시위 여파로 스트리밍 서비스 목록에서 삭제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평가가 금세 졸작 혹은 망작으로 달라지진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심되는 과실의 정도와 폭이 어마어마해, 그동안 어렵게 쌓아왔던 업적이 한순간에 덮여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일수록 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업적과 과실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 과실에 따른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설령 죗값을 치러야 하는 당사자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주변에서 과실을 눈감아주고 부추겼던 이들이 누구였고 왜 그랬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실이 드러나기도 전에 누군가를 과실을 범한 당사자로 못 박아, 그 사람의 지난 일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 술 더 떠 여기에 어떤 '... 이즘' 내진 모종의 정치적 의도를 슬쩍 얹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진영을 제압하기 위한 전술적 장치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음험해 보일뿐더러 과실의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여러 차례 반복하지만 요즘은 삶의 윤리적 태도를 지켰는지 여부와 대외적 업적의 가치가 동일하게 평가받는 추세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와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삶의 윤리적 태도를 지켰는지 여부는 주장과 의견으론 가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주장과 의견을 쏟아낸다고 혐의가 사실로 바뀌진 않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의 모든 업적을 송두리째 앗아갈 순 없다는 것이다. 


흠결 없는 인생 어디 있겠느냐며 어떤 삶이든 '좋은 게 좋다' 식의 '주례사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건 문제다. 과실은 비판하고 업적은 칭찬하는 게 옳다. 더불어 과실로 업적을 혹은 업적으로 과실을 각각 가리려 하는 건 옳지 않다. 공(功)과 과(過)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영향을 미칠 순 있지만, 하나로 뒤섞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칭찬과 비판 그리고 죗값을 묻는 행위는 특정한 '.... 이즘'과 과격한 진영 논리를 배제하고 명확한 사실 규명을 전제로 할 때만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우리 모두가 혼란스러운 지금, 다시 새겨볼 대목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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