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기자의 연예수첩 5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당시 김기덕과 홍상수가 밟기 시작했던 산업적 독자행보의 첫 걸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앞서 '...김 감독과 홍 감독을 투사나 선구자로 미화하는 것은 확대 해석일 수도 있다' '특히 김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관객들과 언론을 상대로 약간 심통을 부리는 것같아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쓴 대목에서 일찌감치 밝혔듯이, 둘 다 저예산 영화의 길을 일부러 고집하고, 충무로로 대변되는 한국의 상업 영화 제작 및 상영 시스템과 애써 멀어지려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작품에 어울리는 시스템을 찾으려 한 것일 뿐, 이같은 선택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적 대의(大義)를 좇으려 한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그 와중에도 김기덕과 홍상수를 조금이나마 지지했었다. 때로는 작품을 만들고 개봉하는 방식의 새로운 시도 가 만듦새의 좋고 나쁨 혹은 대중의 반응 여부를 어느 정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평단과 관객이 환호하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 걸어간다면, 그래서 해외 영화계로부터 계속 인정받고 한국 영화의 세계적 위상을 견인하며 '돈독'이 잔뜩 올랐던 당시 한국 영화계에 일말의 다양성이라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자체 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지 않겠는가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때의 믿음과 나름의 논리가 지금도 여전한지 자문하게 된다. 답은 안타깝게도 '여전하지 않은 쪽'이다. 솔직히 여전하지 않은 수준에서 더 나아가, 두 감독을 응원했던 게 잘한 일이었는지 이제는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론 우리 사회의 오랜 사회적 윤리 규범을 가볍게 무시하고, 한 술 더 떠 범죄 행위까지 저지른 것으로 의심받는 이들을 개척 정신에 가득찬 영화 작가란 이유 만으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란 고민이다.
인물 특히 유명인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기준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다. '뭘 했느냐' 만큼 '어떻게 했느냐'도 중요해졌다. '인민재판' '털어서 먼지 안 나랴' 식의 가혹한 여론몰이가 멀쩡한 생사람을 잡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제 아무리 위대한 업적도 도덕적 흠결까지 감추지는 못하는 세상이다.
이같은 사례는 해외에서 더 잘 찾을 수 있다. 한때 손대는 작품마다 '영화의 교과서'를 써 내려갔던 로만 폴란스키도,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연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천재' 우디 앨런도 이처럼 엄격해진 윤리적 잣대로 인해 페이드 아웃의 위기에 처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성(性) 추문이 영광으로 가득했던 반 세기 이상의 영화 경력에 결국 구멍을 내고 만 것이다.
잠깐이라도 사람들의 눈에 띌까 꼭꼭 숨어사는 요즘의 김기덕과 홍상수가 15년전 비포장도로를 자청해 걷기 시작했을 때의 굳은 결기와 집념으로 영화 만들기에만 전념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고만고만한 상업 영화에 질릴대로 질린 관객들은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져 좋을 것이다. 최근 급격히 획일화되고 있는 영화계는 둘의 작가적 기운을 이어받은 새내기 작가들의 등장으로 '종(種)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잠행에서 벗어나 영화계로 돌아올 마음이 있다면, 문제가 됐던 삶의 궤적을 어떤 식으로든지 되돌아보며 진심으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문제적 인물들의 문제적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지만, 괜히 찜찜하고 싶지는 않은 관객으로서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