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기자의 연예수첩 53
얼마 전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아니 범인인 이춘재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본인 대신 누명을 뒤집어쓴 채 억울한 옥살이까지 했던 윤 모 씨에겐 미안하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춘재를 수 차례 만났다는 프로파일러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과거 자기가 저질렀던 범행을 마치 남의 일인 양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감정에 무심하고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이 읽혔다"라고 말했다.
또 이춘재를 효과적으로 심문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도 공개했는데,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영화 '살인의 추억'이 큰 도움을 줬다고 털어놨다. '어떻게 저기까지 파고들었지'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사건의 충실한 재연과 범인의 심리 묘사 등 모든 면이 탁월해서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당시만 해도 유력 용의자였던 이춘재의 검거 소식을 접하고 "추억한다, '살인의 추억'을"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출고했다. 17년 전 '살인의 추억'을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30여 년 만에 잡혔다는 소식에 '살인의 추억'을 처음 봤을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2003년 4월이었다. '살인의 추억' 시사회가 종로 서울극장에서 열렸다. 대기업 계열의 복합상영관이 뿌리내리기 전인 당시만 하더라도 기대작들은 주로 서울극장에서 첫선을 보이는 게 관례였다.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와 봉준호 감독, 송강호와 김상경이 제작자와 연출자 그리고 주연배우 자격으로 영화 상영 전 무대에 올랐다. '살인의 추억' 직전 '지구를 지켜라'의 처참한 흥행 실패를 겪은 차 대표와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관객으로부터 심하게 외면받았던 봉 감독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송강호만 "제가 처음으로 베드신을 찍었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관계자들 모두가 영화의 소재가 됐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으려 극도로 애쓰던 모습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았다.
알고 보니 경기 화성 지역사회의 반발을 의식해서였는데, 다행히 기각되긴 했지만 화성문화원으로부터 상영금지가처분신청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선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주 기분 좋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잡히지 않는 결말의 스릴러는 흥행 필패'라는 그때까지의 극장가 속설이 마음에 걸렸다.
이 때문이었을까, '뛰어나게 잘 만들었지만, 우울하고 알 듯 모를 듯한 결말 때문에 아마 망할 거야'라고 예상했었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