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기자의 연예수첩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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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연배(이스트우드는 올해 88세다)의 둘은 1950년대 후반 한 영화 오디션에서 나란히 물을 먹었던 걸 시작으로 겉으론 꽤 가깝게 지내는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나이를 먹고 인기 내리막길을 타면서 불안해진 레이놀즈와 이스트우드는 1984년작 '시티 히트'의 투톱으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는데, 레이놀즈가 왕년의 인기만 믿고 거들먹거리자 성질 고약한 이스트우드가 격투 장면 촬영을 빙자해(?) 레이놀즈의 턱을 날려버려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운명의 주먹질인가? 맞은 레이놀즈는 공교롭게도 턱 부상 이후 안 그래도 내리막길을 타던 인기가 더욱 곤두박질친 반면, 때린 이스트우드는 마초 성향의 액션스타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 작가'로 발돋움했다.
그렇게 할리우드 변방으로 완전히 밀려난 줄 알았던 레이놀즈가 뒤늦게 연기파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1997년작 '부기 나이트'였다.
전설적인 포르노 스타 존 홈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통해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자화상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파헤친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인 '대물(大物)' 에디(마크 월버그)를 포르노 업계로 입문시키는 포르노 감독 잭 호너 역을 맡아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선보였다.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고 평생 거리가 멀 듯 싶었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오르기까지 한 레이놀즈는 타계 직전까지 할리우드에서 '재발견'의 훌륭한 사례로 언급되곤 했다. 섹스심벌 이미지에 가려있던 그의 출중한 연기력을 눈치챈 '부기 나이트' 연출자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감식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영화계에도 '버트 레이놀즈'가 꽤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활동을 중단하고 아예 영화계를 떠나 이름을 언급하긴 힘들지만, 남성적 매력을 무기로 스크린을 무대 삼아 활발히 활동하던 남자 배우들이 실은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범람했던 호스티스 멜로물과 토속 에로물을 통해 나름 높은 지명도를 누렸는데,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충무로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해 지금은 영화팬들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중 몇몇은 연극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닦아 연기파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음에도, '제 살 깎아먹기' 식의 호구지책으로 수준 낮은 특정 장르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면서 능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다.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로 변희봉을,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로 백윤식을 각각 재발견했던 것처럼, 능력 있는 연출자가 그 시절 '충무로의 버트 레이놀즈'를 화려하게 되살려주면 어떨까.
배우 당사자에겐 '제2의 연기 인생'을, 관객들에겐 '새로운 얼굴의 발견' 혹은 '왠지 익숙한 얼굴의 변신'이란 즐거움을 각각 제공하는 1석2조의 효과가 기대된다. 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조연 기근' 현상도 해소할 수 있지 않겠나.
레이놀즈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든 생각이다.
위에서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름부터 테스토스테론이 줄줄 흘러내리는 마흥식과 고(故) 임성민 같은 그 시절 남자배우들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버트 레이놀즈를 트럭으로 싣고 와도 이겨내지 못할 만큼의 강렬하면서도 끈끈한 남성미를 뽐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 가운데 고인이 된 임성민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 남산의 영화진흥공사 시사회실에서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솔직히 얘기하면 만났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먼발치에서 훔쳐본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뭐든지 트집 잡고 시비 걸기 좋아하는 남자 중학생이 보기에도 정말이지,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드라마와 연극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탄탄한 기본기를 닦았지만 '야한 영화' 전문이란 굴레를 이겨내지 못했던 마흥식 그리고 에로배우 이미지를 어렵게 벗자마자 간암으로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난 임성민 모두 기억할수록 아까운 연기자들이다. 이들이 좋은 감독과 작품을 자주 만났더라면 지금쯤 어떤 배우로 평가받고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