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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ial Scientist May 01. 2020

[책] 위험한 민주주의 - 야스차 뭉크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냉전이 종결된 이후의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이데올로기적 발전이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승리를 한 이후로 자유민주주의가 최종적 형태의 이데올로기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그의 장밋빛 예상과는 달리,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로 상징되는 포퓰리스트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시기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자유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퓰리즘이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보수 진영에서 진보 진영을 공격하거나 비판할 때 사용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이 단어는 대중의 입맛에 맞지만 비현실적인 공약을 추진하기 위해 국가 재정과 세금을 낭비하는 행태를 비난하기 위한, '대중영합주의'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포퓰리즘의 핵심을 제대로 포착하지 않을뿐더러, 종종 정치적 현실을 왜곡하는 데 이용된다. 포퓰리즘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복지 지출을 늘리는 좌파 정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좌우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때문에 나는 포퓰리즘을 서구적 의미의 포퓰리즘으로 정의하겠다. 물론 아직까지도 포퓰리즘의 개념에 대해 확립된 정의는 없다. 포퓰리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학자가 있는 한편,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같은 온전한(full) 이데올로기가 아닌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조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사상적 특징의 총합으로 봐야 한다는 학자가 있다. 각기 포퓰리즘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다르기는 해도, 몇 가지 공통분모는 존재한다.


첫째, 포퓰리즘은 국민을 두 집단으로 거칠게 분류한다. 한 집단은 평범한 사람들(the [ordinary] people)로, 동질적(homogenous)인 일반 의지(general will)를 갖고 있는 선한(good) 집단이다. 다른 집단은 그 외의 사람들(the others)로 어떤 방식으로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나쁜(bad) 집단이다. 둘째, 포퓰리스트 정당 및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이 국민들을 대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국민의 뜻(the will of the people)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국민(the people)이란 위에서 말한 동질적이고 선한 집단이며, 여기에는 이민자나 정치 엘리트 등의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국민의 뜻은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포퓰리스트들의 외침이다. 사실 포퓰리스트들은 더욱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에서는 국민의 뜻이 만능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의 반대말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가 익숙한 자유민주주의와 다르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결핍된 것이라 볼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시스템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변환하는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긴장(tension)이 존재한다. 때로는 개개인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다수결 원칙에 입각한 국민의 자치에 헌신하는 것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반자유주의가 될 수 있고,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비민주적일 수 있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내재한 긴장,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줄타기를 이용하며 성장해왔다.

Populism exploits the tensions that are inherent to liberal democracy, which tries to find a harmonious equilibrium between majority rule and minority rights. (Mudde & Kaltwasser, 2017)

예컨대, 유럽연합으로 묶인 국가에서는 개인의 권리는 존중되지만 유권자가 공공정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유럽연합의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주요 분야의 공공정책을 펼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비민주적 자유주의(undemocratic liberalism)인 셈이다. 2008년 세계 경제공황 이후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이 심각한 국가 부채 위기에 빠졌을 때, 소위 트로이카 - 유럽연합(EU), 유럽 중앙은행(ECB), 그리고 세계 통화기금(IMF) - 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긴축 재정을 요구했다. 물론 트로이카는 유럽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이들로 구성되지 않았으며 남유럽 국민들은 긴축 재정에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어쨌거나 긴축 재정이 실행에 옮겨졌고 그 여파로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남유럽 국가들의 정치 지형에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반대로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 반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도 있다. 서유럽의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지향하는 체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소수 민족, 성소수자, 종교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수한 국민(the pure people)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브렉시트를 결정하는 국민투표 또한 '진정한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한 선거였다. 이는 국민투표로 결정된 바니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으나, 개인의 권리가 무시된 '절반의 자유민주주의'였다.


이처럼 서구 정치체제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란, 그 자체에 내재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 아슬아슬한 줄타기 싸움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가 안정될 수 있었던 과거의 조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까? 대답은 아마 "그렇다"일 것이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다분히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경제 호황, 그 당시 사회 구성의 '동질성', 그리고 소수 거대 언론매체로만 이루어진 미디어 환경에 의존하여 제 기능을 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근본적 원칙에 부합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껏 좋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충성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이후 수십 년 동안 대규모로 이민이 이루어졌고 격렬한 사회운동 시기를 거쳐 소수자들이 마침내 동등한 지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소수자들이 불평등을 겪고 있다. 사회학자 아이다 하비 윙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 백인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인종적 소수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인종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고, 인종에 대한 (보통 부정적인) 고정관념에 따라 대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포퓰리스트들에게는 소수자들이 겪는 현실적 불평등보다는 그들이 느끼는 지위 불안이 더 중요하다. 즉, 이민에 대한 분노의 크기는 '현실'에 대한 불만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 두려움'에 더 좌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퓰리스트 정당은 이민자가 적은 지역에서 인기를 누렸으며 오히려 소수자 집단이 더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예전의 경제적 번영은 이미 지나갔고 다들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치 싸움에 걸린 몫을 더욱더 중대하게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제적 '현실'보다 경제적 '불안'이다. 우리는 비록 나름의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물질적 발전에 대한 기대는 깨진 지 오래됐고 미래에는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만연하다. 좋은 일자리와 연봉 등,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성취적 정체성'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인종, 성별 등의 '귀속성 정체성'만이 남는다. 자신의 직업에서 더 이상 성취적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 분노의 대상은 종종 귀속성 정체성이 나와는 다른 타자가 된다.


종합하면, 자유민주주주의가 번영할 수 있었던 예전의 조건들이 희미해졌다.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예전처럼 사람들에게 좋은 삶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와중에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 위태로운 균형이 깨지고 있다.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는 인류 이데올로기의 최종적 형태도 아니며 유일한 대안도 아니다. 결국은 (너무나도 뻔한 말이지만)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타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용할 게 아니라 해소해야 한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단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배척되는 집단이 없어야 한다. 그 대상이 당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포퓰리스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처럼)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국경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한다. 브렉시트 이후의 정치적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국 SF 드라마 'years & years'가 결코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그것이 우리가 경계하기를 멈출 때 도래할 가까운 미래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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