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원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위로
살다 보면 가끔 힘든 날들이 있다.
어느 날이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렵겠지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기분을 담아낸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도 참 힘들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이 일을 겪으면서 "힘들다"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정말 "고통스럽다"는 말이 제일 처음 떠올랐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고통을 이해하고 말하는 게 불가능해서 외면만 했었다. 며칠 전이 되어서야 이 "고통"이 뭔지, 나는 왜 이렇게 미쳐버릴 것 같은지 파헤쳐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먼저 들었던 생각은 누군가는 분명 고통에 대해서 고민했을 텐데, 누군가는 고통의 종류에 대해서 백과사전처럼 다 써놓았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종류의 고통인지 알게 되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고통을 겪고 있다 보면,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고통을 일으킨 외부 원인을 처벌하는 것에 집중하게 될 때가 있다. 진실을 밝혀 누군가를 고소한다거나 사회적인 낙인을 찍는다거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건 고통을 겪는 사람의 절대적인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그저 또다시 이야기가 촉발되어 나에게로 초점이 맞춰지고 비난마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을 뿐이다.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잘못이 없는 내가 끝이 없을 것임을 느끼고 어디론가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는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송사는 정말 지치는 일이다. 그리고 정말 긴 싸움이다. 겪었던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지나도 법 앞에서 무의미한 일이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난 그저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고, 그 방법은 처벌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까 기대도 해보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이 고통의 끝맺음을 맺을지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겪는 이에게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당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했을 때 견딜 만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도, 이 말은 고통을 겪는 이에게 들어오지 않는다.
흔히 하는 안부 인사가 이렇게 괴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잘 지내니?" "일은 어때?" 이런 사소한 말들이 세상을 따뜻하게 채워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인사를 받으면 입 안에 솜이라도 잔뜩 물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응, 잘 지내"라고 말하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사람이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가장 큰 고통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기 싫어도 생각이 난다. 생각한다고 해도 답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도 없다. 생각을 해야 말할 수 없는 것을 직시하게 되고, 그래야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큰 고통이다.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생각이 멈추지를 않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세워서 가지를 뻗혀본들 그걸 이루기 위해선 현재가 변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 것 같아 조급해진다. 생각을 멈출 수 없어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해 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내 자신의 고통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 나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그런 것 같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지난 몇 달 동안 고통스러워서 친구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계속 말만 했다. 고통스럽게 된 계기를 이야기로 들려주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을 가져다가 말하기도 하고, 말하는 당시에 느낀 아무 말이나 할 때도 있었다. 물론 늘 눈물도 흘렸다. 난 고통에 대해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표현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건넨 말은 모두 내 '고통의 소리'였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고 나니,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나의 '소리 있는 아우성'이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나는 언제쯤 내 고통의 곁에 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