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나리 Dec 21. 2019

1분 1초가 느리게 흘러갈 때

'지금'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

'시간은 금이다'처럼 인간이 가진 유한한 시간을 귀중하게 쓰라는 격언이 있다. 참 좋은 말이다. 나도 공감했던 말이다. 그런데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지옥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학교, 사무실, 아르바이트 장소 그 어디든 몸이 묶여있을 때면, 느리게만 흘러가는 1분 1초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간다. 또렷이 느끼고 격렬히 감내해야 한다.


우울한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심지어 멈춘 것처럼 느껴져서 이렇듯이 더디 가는 무의미한 시간이 공포스러워집니다.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그렇다. 지금 내 시간들은 고통으로 가득 찬 것도 모자라 무의미까지 하다. 이젠 나를 그만 놓아주고 쉬어야 할 때라는 생각만 간절하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참 공포스럽다. '지금' 이 시간들을 다 모아서 휴지통에 넣어 삭제해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냥 몇 달 뒤에 상쾌한 마음으로 깨어나고 싶다.


물론, 그 몇 달 뒤가 지금보단 나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나는 또 바보처럼 품고 있다.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사건들과 실패들을 예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당신은 이제 곧잘 받아들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내가 절망적인 사건들에 유독 연약한 사람인 건 아니다. 어린 나이에 빨리 취업하고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도우면서 홀로 씩씩하게 서울 살이를 해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이 맞닥뜨린 소송까지 몇 년간 견뎌왔다. 어려운 일은 예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되었고 견디는 힘도 강해졌다.


그러나 힘없이 내가 주저앉게 된 건, 나 개인을 향한 압도적인 고통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에서 몰려오고 있고 나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 아무도 도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사람이고 그 일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겨진다.

피해자는 세상이 무너진 듯 살아야 하나
그에게도 지켜내야 할 일상이 있는데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이 파괴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그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마음이 망가져 고통스러운데도 어떻게 보면 마지막까지 나 자신을 피해자라고 지칭하지 않는 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커다란 피해가 입혀졌고, 일상이 파괴되었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일단 돈은 필요하니 기계처럼 일어나 회사에 가서 일을 한다. 동료들과 먹을 점심을 매일 고르고, 혼자 영화관에서 볼 영화를 예매한다. 혼자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 잠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참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말을 안 해서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1분 1초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른다. 내 일상도 고통을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지속되고 있다. 지금을 견뎌내고 무너져가는 일상을 꼭 지켜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힘든 게 아니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