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도 계기가 되어선 안 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추모 공간에 다녀온 후

by 머비

6호선 신당역에서 제법 걸어 2호선 신당역 화장실 앞에 위치한 추모 공간에 도착했다. 사실 길을 잘 몰라서 조금 헤맸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문득 앞에 가는 여성분이 나와 같은 공간을 향하는 것 같아서 방향을 바꿨더니 추모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아야만 했다. 늦은 시간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빈손으로 간 나는 묵묵히 명복을 비는 것만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내릴 때, 길을 몰라 같은 곳을 맴돌 때, 길잡이를 해주셨던 분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모습을 볼 때, 포스트잇을 붙이며 옆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 매 순간 상실감을 느끼고 허탈함을 겪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더 많은 여자가 죽어야 세상이 바뀔까, 철저한 계획범죄다,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하라,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 나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 이런 말이 적힌 포스트잇을 읽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떨어지기 직전인 포스트잇을 꼭꼭 누르며 오래 붙어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보이는 모든 헐렁이는 종이들이 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어 붙였다. 옆에서 묵념하던 분은 다음에 테이프를 사 와야겠다고 말했다. 그분은 내가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가는 길에 유독 무채색 차림새인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국화꽃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추모 공간에 모였다. 연인이 손을 잡고 함께 추모하기도 했고 지나가던 중년 남성들이 가해자를 잡아서 죽여버려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화를 냈고 또 누군가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날 추모 공간에 갔던 나는 참담한 심경으로 와서 더욱 참담해진 마음으로 돌아갔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여전한 것도 많다. 여전한 것들은 종종, 아니 꽤 자주 나아진 척 탈을 뒤집어쓰고 일상 속으로 숨어든다. 그러고선 뻔뻔하게 우리를 비웃는다. 변하지 않은 건 내가 아니라 너희라고, 너희가 예민하고 유별난 거라고. 그들의 말처럼 우리는 예민하고 유별나다. 잘 믿으면 순진하고 못 믿으면 재수 없단 소리를 듣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계속 의심하고 화를 내야 한다. 경계심과 경각심이 생존전략이 된 이곳에선 예민하고 유별난 여자들이 서로를 도와야 죽지 않을 수 있으니까.


범죄를 사랑이라고 칭하는, 여지를 줬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말하는, 창창한 청년 앞길 망쳤다고 안타까워하는, 아직도 이런 범죄들이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지금 이 광경을 직면해야 한다. 매일 다른 나이대와 이름으로 보도되는 죽어나간 여자들과 그들의 죽음에 무력감과 원통함을 느끼는 또 다른 여자들을. 당신들은 그들의 죽음에 막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들은 여전히 가해자의 형벌을 가볍게 만들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게 굴 것'을 명령한다. 당신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보다 죽인 사람의 편을 들며 사건을 거꾸로 해석한다. 당신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꾼다. 당신들이 꿈꾸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여자는 없다.


세상은 늘 여전하지만 그래도 변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고, 보도 방식이 바뀌고, 아무렇지 않게 썼던 단어가 대체되고, 법안이 발의되고, 여성의 안전은 공약의 주축이 되었다. 나의 오랜 바람은 변화를 거쳐 앞으로 내가 이런 글을 쓸 일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더이상 여자들의 죽음이 계기가 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어떤 여자도 그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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