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현실적인 만큼 히어로의 포스 사라져
사건 해결보다 끌려 다니기만 하는 배트맨
장엄한 음악과 찰진 효과음이 불어넣는 생기
모두가 기다려왔던 새로운 배트맨 영화가 개봉했다. 그 어떤 배트맨 영화보다 현실적이고, 원작 코믹스를 잘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더 배트맨’.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새로운 배트맨은 실로 장엄하다 느껴질 정도의 멋들어진 음악과 함께 박수를 불렀고, 트라우마에 갇힌 히어로의 어두운 고뇌를 세밀하게 그렸다. 허나 이렇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더 배트맨’은 애매하다는 감상을 남긴다. 길어도 너무 긴 러닝타임 덕이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맷 리브스 감독은 국내 관객들에게도 자주 얼굴을 비췄던 유명인사다. 2008년 개봉한 영화 ‘클로버필드’를 비롯해 ‘렛 미 인’(2010),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혹성탈출: 종의 전쟁’(2017)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재미를 선사해왔다.
이처럼 감독부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데 할리우드 유명 배우이자 감독이며 ‘저스티스 리그’에서 배트맨을 연기한 벤 애플렉이 제작을 맡았다는 사실, 한때 ‘발연기’의 대명사였으나 이제는 어엿한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로버트 패틴슨이 새로운 배트맨이 됐다는 것 등은 ‘더 배트맨’에 대한 기대를 한껏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이유일까. 막상 뚜껑을 열어본 ‘더 배트맨’은 그동안 기다려왔던 것에 대한 보답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단 답답함과 아쉬움을 가득 남기는데 그쳤다. 트라우마에 갇혀 어둑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는 배트맨(로버트 패틴슨)과 광기에 찬 도시 고담의 습함이 스크린 가득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카체이싱과 타격감 넘치는 액션이 말초신경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분명 ‘지루했다’.
이 ‘지루했다’는 표현을 굳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일정부분 재미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더 배트맨’에 부족함은 없었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를 훌륭했으며, 빌런들을 연기한 여러 조연들 역시 영화를 든든히 받쳐줬다. 시원한 미국식 슈퍼 히어로 무비보다는 둔탁한 한국식 건달 영화가 생각나는 현실적인 액션은 타격감이 넘쳤고,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아니라면 결코 흉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카체이싱은 박수를 불렀다.
영화의 음악은 장엄함을 넘어 아름답다 느껴질 정도로 큰 축을 차지하며 관객의 심상을 북돋았고,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가 남긴 길을 따라 심연을 바라보는 듯한 인간 내면의 어두움과 고뇌, 우울함과 진창을 그리려 했던 것 역시 마블과는 다른 DC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엿보여 반가웠다. 특히 원작 코믹스 속 탐정으로 활약했던 배트맨의 모습을 최대한 살리려 했던 것도 신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배트맨’은 지루했다. 수없이 나열한 장점들에서 알 수 있듯 ‘더 배트맨’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너무 과했다. 수 없이 많은 정보가 장면마다 집약돼 있고, 의미를 찾아보라는 티가 역력한 느릿하고 무게 있는 연출이 긴 러닝타임 내내 이어져 보는 이에게 부담을 안겼다. 각 캐릭터의 설정부터 대사,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짚어주는 카메라의 시선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때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때문에 영화는 훨씬 짧을 수 있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176분이라는 기록적인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물론 이보다 긴 영화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있지만, 히어로 무비를 찾는 관객들에게 진중함과 우울함으로 3시간을 채워주려던 것은 분명한 패착이다. 각 장면은 멋들어졌지만, 시종일관 설명적인데다 히어로와 빌런이 엎치락뒤치락 하지도 않는다. 되레 히어로가 빌런에게 176분동안 끌려 다니기만 하는 모양새다. 이래서야 주인공이 배트맨인지 빌런 리들러(폴 다노)인지 헷갈릴 정도다.
배트맨과 주요 빌런들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중요한 조연 캐릭터들은 의미 없이 나풀거린다. 특히 브루스 웨인의 정신적 지주로 그의 심상을 받쳐줘야 할 알프레드(앤디 서키스), 배트맨의 연인이자 또 다른 안티 히어로인 캣우먼(조 크라비츠), 배트맨의 든든한 조력자 제임스 고든(제프리 라이트), 이 세 캐릭터가 문제다. 실상 이들을 없애도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만 하다. 이들은 사건을 복잡하게 하거나 명쾌한 해결책을 주지도 않는다. 배트맨에게 큰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 역시 아니다. 말 그대로 병풍이다.
현실적인 액션과 스토리, 배트맨의 모습을 그리려 애 쓴 것은 새롭고, 반가웠으나 이 역시 과했다. 슈퍼 히어로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 해내지 못할 것을 통쾌하게 해내는 데서 짜릿한 재미를 선사한다. 배트맨의 인간적인 면모와 입체적인 모습, 현실적인 액션은 좋았지만, 과하게 현실적인 바람에 배트맨의 ‘멋’이 다 사라져버렸다. 동네 건달에게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의 배트맨을 보고 있자면 현실적인 연출이 좋다는 생각보단 ‘무슨 히어로가 저렇게 어설퍼’라는 생각이 먼저다.
이 밖에도 충분히 생략적일 수 있고 관객의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을 법한 장면에서 부러 느릿하게 속도감을 준다거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특정 요소를 강조하려는 연출도 너무 여러 번 반복됐다. 호기심이 일고 집중이 되려다가도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보니 짜증이 밀려온다. 되레 본디 배트맨의 상징과도 같던 부(富)의 철옹성은 과감하게 생략됐으나 이는 역효과를 불렀다. 배트맨의 포스가 온데간데 없이 비루한 생쥐 꼴로 등장하는 브루스 웨인의 모습이 담긴 장면들은 히어로에 대한 마땅한 기대와 설렘을 앗아갔다.
요컨대 장점이 많지만 극명한 단점 두엇이 모든 것을 상쇄시킨 작품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제시한 ‘조커’의 길을 따라 어두움과 음습함을 무기로 삼았지만, ‘조커’가 가졌던 탄력성과 감각적 재미는 사라졌다. 액션이 현실적인 만큼 히어로를 향한 기대를 반감시켰고, 결국 어떤 비극도 제대로 막지 못한 배트맨의 활약상(?)은 끝내 실망을 안긴다. 히어로의 인간적 성장보다는 빌런에 휘둘리며 쫓아가기에도 숨가빠하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긴 러닝타임 동안 주구장창 이어지는 설명에 지루함은 배가됐고, 다시 한번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그리워진다.
# 영화 기본정보
지난 2년 동안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며 배트맨으로 살아온 브루스 웨인. 알프레드와 제임스 고든 경위의 도움 아래, 배트맨은 부패한 공직자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활약한다. 고담의 새로운 시장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잔혹한 연쇄살인과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 배트맨은 사건에 남겨진 단서를 추적해가며 자신을 향한 리들러의 메시지를 깨닫는다.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복수, 정의 사이에서 배트맨은 악의 고리를 끊는다.
영화 ‘더 배트맨’은 자비 없는 배트맨과 그를 뒤흔드는 수수께끼 빌런 리들러의 대결을 그렸다. 히어로 무비 사상 가장 사실적이면서 인정사정 없는 폭투 액션을 표방하는 작품으로, 배트맨으로 활동한지 2년차인 브루스 웨인이 탐정으로 활약해 추리극으로서 매력을 뽐낸다. 영화는 2D, IMAX, 돌비 애트모스&돌비 비전(Dolby Atmos&Vision), ScreenX, 4DX, SUPER 4D 포맷으로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개봉: 3월 1일/ 관람등급: 15세이상관람가/감독: 맷 리브스/출연: 로버트 패틴슨, 폴 다노, 조이 크라비츠, 앤디 서키스, 제프리 라이트, 콜린 파렐, 피터 사스가드, 존 터투로, 제이미 로슨/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러닝타임: 176분/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