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어 쓴 어머니라는 여자에 대한 짧은 에세이
엄마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도 그렇듯이 자신의 든든한 영원한 지지자요,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견디다 이내 다시 자라나는 봄날의 햇살을 받는 화원의 꽃처럼 따뜻한 온기를 가져다 주고, 그 이름 석자만 있다면 언제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존재, 살면서 겪게되는 사랑의 대한 배신에 대한 한없는 위로와 평화를 가져다 주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대게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어머니라는 이름 보다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엄마와 우리는 늘 함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적으로 그녀에게 기대며 삶이라는 무게 보다는 친구들과와의 추억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던 학창 시절이 늘 그리워지는 것은 엄마라는 친근한 존재가 항상 나의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스럽고도 아름다운 어린시절을 지나 스스로의 돈벌이와 꿈을 향해 독립을 한 성인이 되었어도 엄마는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엄마는 여성에게는 친구로 다가오나 봅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남자를 알게되고 그와의 시간을 인생이라는 시간표에 함께 담아내기로 결정하고 또 그 이후를 그와 살게 되도 여성은 엄마라는 친구를 가슴속에 간직한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회도 여성의 엄마에 대한 애착은 뭐 그리 어색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라고 모두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 성인이 된 여성의 엄마에 대한 애착은 어느정도 용인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은 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수 있는 존재입니다. 일치감치 수많은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도 가련하고도 힘 없는 존재일지라도 남성과와의 사랑 앞에서 대단히 과감해지고 용감해집니다. 이는 분명 여성은 사랑이라는 힘이 남성보다는 훨씬 크게 작용한다고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한 수용이 여성에게는 모든 것이 익숙한 것이겠지만 남성에게는 사랑은 감정의 작용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임무이며 달성해야 하는 의무이거나 목표인 듯 합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여성보다는 다소 깊지만 표현은 별로 없는 의식속에 관념적인 사랑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감에 있어서 사랑이 최고의 가치일 수 있는 여성에게 이러한 남성의 사랑에 대한 관점은 상당한 불편과 때로는 실망 내지는 후회로 남겨지는 경우 다분합니다.
그것은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있어 어머니란 존재는 때로는 토닥거리거나 때로는 믿음을 줘야 하는 대상입니다. 어느 때는 그녀의 애인이 되어야 하고 때로는 그녀의 아버지가 되어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딸이 아닌 아들을 가진 엄마라는 입장에서는 가족이라는 틀안에서도 자신의 성과는 다른 아들로 부터 받을 수 있는 감정의 공유나 위안은 훨씬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늘 외롭고 쓸쓸하며 자신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들에게 의존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연구를 통해 이를 증명하거나 아니면 철학자 처럼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도 없는 저로서는 여러분에게 제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해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그의 대한 사랑의 확신과 환희와 소망으로 어쩌면 자신의 몸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그 강렬한 일체감의 황홀함이 임신이라는 큰 어려움과 버거움을 견디며 출산하고 또 양육해나갑니다. 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성은 결혼이라는 토대를 지켜나가기 위해 사회생활이라는 보다 더 많이 그리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취득하기 위해 그녀와 만들어가는 결혼생활을 2순위로 밀어냅니다.
그러는 중에 여성은 외로움을 느끼기 되면서 아들에게 그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지요.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이나 애착은 누구는 그럴수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스스로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어떤 결핍에 대한 돌파구를 누군가를 애착하게 된다면 결국 자신의 독특성과 개성은 사라지고 그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동일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동일시를 여성은 아들을 향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또한 바로 그러했습니다. 다만 어릴 적 부터 외조부로부터 기독교 가치관을 습득하고 자라면서 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애착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기전에 절대적 신에 대한 소망과 그분에 대한 영원성에 집중하며 기도로 늘 어려움을 이겨내시곤 했습니다.
무뚝뚝하게 짝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소외감을 그분이라는 신에게 맡기어 위로를 받아오셨던 것이지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 중에 만약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분이 계신다면 이 글이 특정 종교 즉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란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저 기독교라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한 한 여자가 있었다고 그것이 저의 어머니였다고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됩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재산 한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어머니는 요즘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환경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변변치 않은 남편의 직업으로 경제적 상황도 늘 허우적거렸으며 두발 뻗고 마음 편히 잘만한 본인의 집도 없이 그저 월세방을 전전하며 살아가신거죠. 그럼에도불구하고 불평을 내거나 지금의 상황을 외면하거나 포기하려고 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며 행여나 올 수 있는 미래의 안정과 기쁨을 위해 오늘을 희생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는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남편은 본인의 기독교 생활을 지지해주기는 커녕 늘 그녀를 괴롭히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울러 그녀의 시어미라는 사람은 늘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그녀의 아들들에게 모진 말을 해대는 등 그녀에게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엄마에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이 사는 남편도 자신의 어머니를 처럼 똑같이 그녀에게 행동 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으며 슬펐을까요? 이제 겨우 나이 26의 어린 그녀가 지금의 내가 바라보기에는 얼마나 측은해보이고 가여워 보이는지 중년이 된 나는 그녀의 과거가 참 안쓰러웠습니다 . 나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이 세상에 수 많은 여자 중에 한명이라는 것은 그녀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기 이전에 여자였음을 아니 누군가의 아내 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것을 해내고 있는 과거와 지금도 그녀는 원래는 여자였으며 여자이고 여자일 것입니다. 중년이 된 아들은 어느새 어머니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은 더욱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나와 같은 실수 투성이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지나온 모든 것들이 실망과 분노와 원망이 감사함으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아들에게 있어 엄마는 고마운 존재인 것입니다. 여자인 엄마는 꿈은 무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