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의 속삭임 Oct 15. 2024

8화 : 두 엄마와 도시락

엄마의 빈자리, 가족들이 면회를 오다. 드디어 퇴원을 하다.


  함께 있던 남편이 떠났다.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직장에 복귀해야 했고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빈자리에 간병인 이모님이 오셨다. 간병인 이모님은 레드와인색 숏컷머리에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분이셨다. 눈매가 약간 올라가 있어서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는데 함께 지내다 보니 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주시고 움직이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싫은 내색 없이 잘 도와주셨다. 어떨 때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서글픈 기색의 나를 웃게 해 주셨다. 나는 이모님께 우리 아이들 얘기를 하고, 이모님은 키우는 강아지 얘기를 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이모님의 손을 잡고 복도 걷기 연습을 빙글빙글하였다.



 내가 입원한 대학병원은 엄마의 직장에서 15분 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가 자주 들러서 나를 살펴봐주셨다. 필요한 것은 없는지, 힘든 것은 없는지 물어보시며 나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잘 먹어야 금방 낫는 거라고 입맛이 없어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도시락에 반찬을 가득히 담아 싸다 주셨다. 소불고기, 진미채, 계란말이. 모두 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시집을 가면 독립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엄마 신세를 더 지는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은 아파왔다. 아이들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나도 우리 집 아이들의 엄마인데. 엄마가 나를 보살펴주는 것처럼 나도 아이들을 보살펴줘야 하는데... 남편은 집에 내가 없으니 빈자리가 너무 크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먹는 게 문제였다. 집에서 나는 늘 요리 담당이었기에 내가 없는 동안 끼니는 제대로 챙기고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이 하원시간에 맞춰 반찬가게에서 배달 주문을 하기도 하고, 마트에서 먹거리를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문 앞에 배송해 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이 어린이집에서 문자가 왔다. 이번주에 아이 가을 소풍이 있다고 했다. 준비물은 간식, 음료수 그리고 엄마표 도시락이라고 했다. 엄마표 도시락. 엄마가 없는 집은 어떻게 하라고 쉽게 엄마표 도시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걸까. 우리 아이의 곁에는 지금 엄마가 없다. 아빠표 도시락은 무리일 것 같았다. 남편은 워낙 유명한 요리 똥손이라서 남편이 만들어준 도시락을 가져갔다가는 아이가 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대안을 생각해 보았다. 맘카페에 수소문해 보니 집 근처에 아이들 도시락을 만들어주는 업체가 있었다. 할렐루야. 천만다행이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도시락 예시사진을 보니 과일에 치킨너겟에 구성이 아이들 취향인 데다 캐릭터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주기까지 했다. 소풍날 아침에 픽업하기로 예약을 했다. 사장님과 몇 번 문자를 주고받으며 예약을 완료하자 안도감과 함께 슬픔의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힘들더라도 정성껏 도시락을 쌌을 텐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표 도시락'을 싸와서 자랑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만 말없이 밥만 입에 넣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공상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아프고 계속 누워있으니 괜한 걱정들과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함께 아픈가 보다.


 

소풍 도시락을 예약하다. 시간맞춰 잘 부탁한다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말이 되어 남편과 가족들이 다 같이 면회를 오겠다고 했다. 엄마, 아빠, 남편 그리고 4살인 첫째까지 함께 온다고 했다. 편도 2시간이 되는 거리인데 내 얼굴을 보러 와준다고 하니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며칠 전부터 설렜다. 토요일 아침, 간병인 이모님과 우여곡절 끝에 목욕재계까지 하고 가족들이 오기를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점심때쯤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면회하러 병실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고, 내가 1층에 내려가야만 모두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서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일단 휠체어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내가 등장하자 모두가 반가워하는 동시에 안타까움과 측은함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낯선 모습에 약간 놀란 듯했고, 집에서 나온 지 2주 정도 되었을 뿐인데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아이 아빠가 시켜서 첫째가 날 안아주었다. 아이를 안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그리움이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사랑들이.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각자 마실 음료를 주문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 소풍은 잘 다녀왔어? 도시락은 맛있었고?"


 "엄마. 소풍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풀도 곤충도 봤고요. 도시락도 예쁘고 맛있어서 다 먹었어요."


다행이었다. 걱정했었는데 도시락도 괜찮았고, 아이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었나 보다.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차츰 나누려는데 휠체어에 앉은 허리와 엉덩이가 서서히 지끈지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불편해서 일어서있겠다고 말하고,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하며 카페 의자를 잡고 서있었는데, 5분 정도 지나자 버틸 수 없다고 또 신호를 보내왔다. 멀리서 온 가족들과 아직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는데... 더 이상 도저히 못 버틸 것 같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허리가 불편해서 병실로 가봐야겠다고. 가족들은 당황했지만 그러라고 했다. 나는 슬펐다. 그리고 많이 서글펐다. 서둘러 휠체어를 타고 갑작스럽게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만난 지 고작 10분밖에 흐르지 않은 때였다.


"와줘서 정말 감사해요. 멀리서 엄마 보러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금방 퇴원해서 갈 테니까 그때까지 아빠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네 엄마, 얼른 나아서 집으로 오세요."


남편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고 난 그 눈물을 뒤로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 침대에 눕자 금세 몸은 다시 편안해졌다. 익숙한 누운 자세. 저려오던 다리도 안정되고 지끈거리던 허리도 덜 아파왔다. 허무했다. 그래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 앞에서 애써 담담한 척하며 눌러왔던 감정들이 흘러나와 쏟아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이었는데 그렇게 돌려보낸 게 아쉬웠고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 공간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또 나홀로 이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까봐 소리 내지 못한 채 숨죽여 울었다. 간병인 이모님은 내가 우는 것을 눈치채고 커튼을 쳐주셨다. 격한 감정이 가라앉고 진정이 될 때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재활을 하기 위해 매일 오후 재활치료실로 갔다. 휠체어를 타고 병실과 다른 층에 있는 재활치료실에 가면 각종 재활 운동기구가 있었고, 치료사들과 환자들이 가득했다. 아기띠에 매달릴 정도로 어린 아기가 운동치료를 받으러 오기도 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구슬땀을 흘리며 각자의 과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숭고하다는 느낌도 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며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배정된 치료사선생님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말투도 손길도 부드러웠다. 치료실 베드에 누우면 오늘은 어디가 아픈지 물으시고는 조금씩 움직임의 가동범위를 넓힐 수 있게 도와주셨다. 처음 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통나무처럼 몸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이기가 어려웠는데 다리를 잡고 앞뒤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게 해 주시자 누워서 무릎을 직각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 단계로 다리 밑에 작은 공들을 놓고 공을 굴리면서 무릎과 다리의 관절들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운동시켜 주셨다. 혼자 있을 때는 다시 아파질까 봐 무서워서 절대로 시도해 볼 수 없었던 동작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야말로 황금손이었다. 재활을 받고 오면 몸이 부드러워지고 달라지는 게 느껴져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재활치료를 받으며 걷기 연습도 꾸준히 했다. 처음에는 복도를 걸을 때 워커를 이용해서 걸었고, 입원 2주 차가 되고부터는 간병인 이모님 손을 잡고 1~2시간에 한 번씩 느린 속도였지만 조금씩 자주 걸었다. 교수님은 아침, 저녁으로 오셔서 내가 얼마나 호전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셨다. 입원한 지 10일 정도 되었을 때, 4일 뒤쯤인 금요일에 퇴원을 고려해 보자고 하셨다. 아직 허리통증과 다리 저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는 줄고 있었다. 서고, 약간은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퇴원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집에 가서 간병인 이 없이 혼자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되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조금씩 시도해 보고, 더 열심히 더 자주 걸으려고 노력했다. 목요일에는 진통제 수액을 한 번 빼보기로 했다. 수액 없이 통증을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수액을 빼기 전보다 약간 더 불편하게 느끼긴 했지만 다행히 먹는 진통제만으로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이제 정말 퇴원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뻤다.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다.



 퇴원하는 날 오전 마지막 재활치료를 받고 치료사선생님께 커피를 드리며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를 드렸다. 치료사선생님이 우리 옆집에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지역에서 재활운동 하는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실에 함께 지냈던 환자분들과 간병인 이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왔다. 분명 아프기 전에는 8월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시간은 점프한 듯 10월 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2주 만에 밖으로 나와 만난 세상은 환하고 아주 눈부시고 소란스러웠다. 처음으로 세상을 접한 것처럼 낯설고 정신이 없었다. 이제 진짜 집으로 간다.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진 나로. 몸이 달라졌지만 생각도 마음도 아주 달라졌다. 일상의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절실하게 느꼈던 3주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다시 새롭게 주어진 삶, 인생 2막의 여정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제목, 본문 그림 출처 :  Midjourney ai 생성그림

이전 08화 7화 : 두 번째 걸음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