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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속삭임 Oct 02. 2024

6화 : 걸으세요. 그래야 삽니다.

대학병원 교수님께 첫 만남부터 혼이 나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나의 상태로 부산까지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방법은 자동차 조수석 앉아가는 방법이었다. 잠시만 의자에 앉아있어도 등허리 쪽과 엉덩이가 아파오고 저려와서 1시간 반은 도저히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1번 방법은 땡! 탈락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가는 방법이었다. 뒷좌석은 정자세로 누울 수 없는 길이여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야 한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이동하다 보면 허리통증이 오히려 악화될 것 같았다. 2번도 제외.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른 요통환자들은 어떻게 병원을 이동했는지 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사설구급차를 이용해서 전원 했다는 글을 발견했다. 구급차를 이용하면 똑바로 누워서 이동할 수 있기에 지금 내 상태에서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업체에 연락을 해보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가능하고, 내가 이동할 거리만큼의 비용은 50만 원이라고 했다.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누워서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돈이 들어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설구급대원들이 약속한 시간에 내가 있는 병실로 왔다. 내가 누워있는 병원침대에서 들것으로 조금 굴러서 이동해 볼 있냐고 했다. 허리가 뻣뻣하고 옆으로 비트는 동작을 하자마자 통증이 밀려와서 못하겠다고 했다. 구급대원 여러 명이 하나, 둘, 셋 구호에 맞춰 내 몸을 조심조심 들어서 들것 위로 옮겨주었다. 들것에 누워있는 채로 구급차에 실려졌다. 구급차는 드디어 부산방향으로 출발했다.



 사설구급차에 누워서 이동하면 편하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탄 구급차 들것은 쿠션이 아주 얇아서 차가 이동할 때마다 노면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지턱을 쿵하고 넘거나 고속도로의 거칠거칠한 곳을 지날 때면 온통 내 허리로 충격을 받아내는 것 같았다. 또 들것 뼈대의 모양이 평평하지 않고 가운데로 움푹 파져서 왼쪽과 오른쪽이 약간 높았다. 그래서 바로 누워도 아프고 모로 누워도 힘들어 몹시 불편했다.  고쳐지지 못해 병원으로 실려간다는 불안감도 더해져 1분 1초도 참기 힘들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회개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동안 살면서 잘 못 했던 것 때문에 내가 이런 벌을 받는구나. 하나님 잘 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빨리 병원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는 마음뿐이었다.



 구급차 운전해 주시는 분이 최선을 다해 시간을 단축해 주셨다. 생각보다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이제야 살았다 하는 마음에 긴장이 풀렸다.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 침대에 눕혀진 채 대기를 다.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누워있는 내 시야에 나타났다. 내가 걱정되어 병원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효녀노릇을 했던 내가 이렇게 서지도, 걷지도 못한 채 누워서 병원으로 실려온 모습을 보시고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아빠는 차마 못 보겠다 등을 돌리고 서계셨다. 나는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응급실 앞 길목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헷갈렸다. 자꾸 혼란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이제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들어가기 직전 체온을 쟀더니 38도가 넘는다고 했다. 자꾸 어지러웠던 게 열이 나서 그런 거였나 보다. 간호사는 내가 코로나일지도 모른다고 격리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갑작스레 격리실로 옮겨졌다. 격리실은 일반 병실이 아니고 음압병실이었다. 외부와의 공기가 차단된 특별한 공간이었다. 긴 면봉으로 코를 찔러 코로나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검사부터 받았다. 느닷없이 코로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잠잘 때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던 나였다. 코로나라고 판정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참 쉽게 흘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검사를 받은 지 30분이 지났을 무렵, 다행히 코로나가 아니라는 판정과 함께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방역복을 입고 나타난 의사 선생님께 지난날에 어떤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고, 지금 내 몸상태는 어떤 지 상세히 말씀드렸다. 최근에 찍었던 MRI CD도 건네어드렸다. 의사 선생님은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가셨다. 한참 뒤, 아까 만났던 의사 선생님과 함께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의사 선생님이 함께 나타나셨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 히스토리 전해 듣고 MRI도 확인해 보았습니다. 지금 어디가 제일 아프시죠?"


"등허리 쪽 하고 엉치 부분이 아픕니다. 왼쪽 다리에 방사통도 있고요."


"MRI상으로 봤을 때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수술까지는 안 해도 되겠고요. 이전의 병원에서 입원 일주일하고, 누워만 있었던 기간이 합쳐서 두 달도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큰일 납니다! 큰 이상 없으니 두려워말고 움직이세요. 걸으세요! 그래야 삽니다.  아프면 진통제를 먹으면서라도 걸어야 해요. 병원에 입원해서 재활해 봅시다."



2022년 9월 어느 날의 일이다.


 교수님은 화를 내셨다. 아니 혼을 내셨다. 첫 만남에 대뜸 혼을 내는 의사에게 거부감이 들어야 정상이지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말속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하였나'하고 뜨악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자식뻘 되는 환자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그의 표정과 어투에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 혼냄이 타박이나 면박이 아니라 아버지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환자 데이터로 내려진 듯 확신에 찬 불안했던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드디어 통증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뒤죽박죽 엉킬 데로 엉켜버린 악순환의 뭉텅이를 조금씩 풀어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프니까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누워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아프지만 걸어야 한다고 하셨다. 진짜 내 몸에 큰 이상이 없다고? 그럼 이 극심한 통증은 허구란 말인?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학병원까지 와서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비록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있을지언정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재활. 지금까지의 내 삶에 없던 단어였지만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재활(再活)이라는 단어 뜻처럼 다시 살아나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잃었던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그림 출처: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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