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김 씨
살면서 힘을 뺄 때와 줄 때를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알까?
욕실 앞 탁자에서 모처럼 백지 위를 달리고 있는데,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하, 문 좀 닫지...' 문 쪽으로 눈을 한 번 흘기고는 다시 글을 이어가려던 찰나 무심결에 들려온 그의 한 마디였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해보라 한다면 난 이렇게 말한다.
진중해야 할 시간에 심각하지 않을 줄 알고, 심각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되레 진중해져서 당황스러운 웃음을 주는 사람.
대체 저 머릿속엔 무엇이 들었을까. 전생에 돈키호테는 아니었을까.
내가 암 투병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보낼 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털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내 몸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놀라움도 어색함도 없었다. 그 무심한 평온함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나는 도저히 되어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 오늘도 내 곁에 있다.
엄할 엄(嚴)
성씨만큼이나 규율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부모님 밑에서 융통성은 죄악으로 치부되는 공기 속에서 나는 참으로 ‘엄 씨’ 답게 자랐다. 그건 우리 집뿐 아니라 친가 친척들의 공통점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흔이 다 되어 귀하게 아이를 가진 육촌 동생 부부가 명절을 맞아 우리 집을 찾았다. 그들은 곧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짓느라 사뭇 비장해 보였다. 항렬자인 '용'자는 쓰기 싫다며 수혁, 정혁, 시안, 시원 등 온갖 늠름한 아들 이름들을 나열했다.
그 진지함 앞에 나도 용기를 내어 한마디를 거들었다.
"딸이면 '엄청나'라고 지었을 텐데, 아들이니까 '엄청시원' 같은 건 어때요?"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던지고는 스스로 꽤 위트 있는 사람이 된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회적 배려였는지 내 농담이 마음에 든 건지, 어색한 웃음이 오가는 찰나 우리 집 '김 씨'가 정적을 깬다.
"그냥 '엄마아빠' 어때? 줄여서 '엄빠'! 하하하하하하하."
제 말에 자기가 먼저 저토록 숨이 넘어가게 웃어버리면 듣는 이는 웃을 타이밍을 잃고 만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와 달리, 본인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기세다. 그 천진함이 때론 철없어 보여 미웠고 때론 기가 차서 허탈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가장 위태로웠던 계절을 버티게 한 건 나의 엄숙한 의지가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준비가 된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 그의 실없는 농담들이었다. 내가 머리카락을 잃고 거울 앞에서 울먹일 때에도 그는 슬픔 대신 "오, 두상 예쁜데?"라며 웃어넘겼지 아마. 그땐 그 무심함이 서러워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나를 환자로 대하지 않기 위해, 나를 엄숙한 비극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해 제 온몸의 힘을 빼고 내 곁을 지켰다는 것을.
그날 밤, 그는 이불속에서 자꾸만 킥킥거렸다. "엄빠! ㅋㅋㅋ"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짧은 음절들이 공중을 떠다니다 내 가슴에 툭툭 걸린다.
당신,
명절이라 당신의 엄빠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겠지.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슬픔의 무게를 겨우 덜어내며 혼자 삭여냈을 당신의 명절이 가여워, 나는 소리 없이 들썩이는 당신의 마른 등을 오래도록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