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머금다.

오감으로 마시는 차

by 엄민정 새벽소리

언니의 손에 이끌려 한 건물에 도착한다. 내가 좋아할 거라며 자신 있게 데리고 간 곳이다. 정문은 안 쓴 지 오래인지 먼지와 오염물질이 굳어져 손잡이를 오돌토돌 덮고 있다. 직감적으로 건물 옆쪽으로 난 문을 찾았고, 녹슨 경첩에서 나는 소리에 한쪽 눈을 찌푸리며 건물로 들어선다. 운동을 멈춘 채 공기에 표류하던 곰팡이 입자의 느닷없는 공격에 코털이 당해내지 못한다. 에취.

반질반질하다 못해 미끌미끌한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니 눅눅한 카펫이 펼쳐있다. 복도 끝방까지 걸어가며 잘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의심하며 언니의 얼굴을 살핀다.


노크를 한 손에 묻은 먼지를 터는 찰나, 철컹하고 철문이 열린다. 주인은 나무로 된 중문 마저 열어주며 은은한 태도로 우리를 반긴다. 눈앞에 나타난 작고 아담한 공간은 따뜻한 조명과 온도로 포근히 객을 감싼다. 벽에 걸린 수묵화와 전통 자개 나비장이 공간을 한층 고풍스럽게 한다. 미세한 연꽃 향과 찻잎의 연한 풀냄새가 방금의 의심과 인상을 말끔히 지운다. 홀의 중앙을 가로질러 길고 널찍한 원목 테이블이 있다. 어디에 앉을지 잠시 고민했고 주인장은 스크린에 가까운 쪽으로 나를 배려해 준다. 의자를 잡아당겨 치마바지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등을 곧게 펴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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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잎을 표현한 선홍의 케이크조각이 이른 아침 주인장의 손에서 정성껏 빚어졌을 생각을 하니 귀하다. 세밀한 질감과 향을 느끼며 한입 베어문다. 금빛 수술로부터 붉게 퍼지다 하얗게 물든 꽃잎. 그리고 가는 핀으로 모양냈을 선명한 잎맥이 생생해서 눈으로 한참을 음미한다.


말차가루에 물을 넣어 팔이 낼 수 있는 최고속으로 젓기 시작한다. 승모근과 팔이 얼얼해지면 다 된 것이다. 미세한 포말이 잔잔하게 덮인 말차는 부드럽게 와서 입술에 흔적을 남긴다. 중국에서 처음 마시기 시작했으나 일본에서 더 응용 발전한 말차에 대한 한탄 섞인 중국인들의 아쉬움도 함께 남았다.


다실(茶室)은 교류와 공유의 공간이다. 함께 차를 마시는 이들과 나누는 차의 맛과 향과 기운을 촘촘한 언어로 풀어낸다. 선조들은 시로 풀어내기도 했단다. 중국의 대표적 명차인 태평후괴(太平猴魁)같은 차를 두고 어떤 이는 백가지 꽃의 향이라 하고 어떤 이는 배 과육의 끝맛 같다고 한다. 각기 다른 표현이 미세한 망에 걸러져 그 범위를 좁히고, 그러다 보면 모두가 동의할 만한 표현을 찾기도 한다. 한 가지 맛을 다른 이의 느낌으로도 느껴보며 미각의 민감도가 높아질수록 맛은 더욱 곱고 가늘게 묘사된다. 경험으로 터득한 섬세한 미각은 다른 차를 맛볼 때에도 한껏 발휘된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왜 하는가? 차를 시음하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수십 종의 차들 중에 내 입에 맞는 차를 찾는 일이다. 그 안에 내가 모르는 나의 취향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 애호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마셔보지 않은 차는 절대 사지 않는다. 하여, 이곳 차의 종주국에서 시음회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같은 브랜드에서 나오는 같은 차라 하더라도 차가 생장한 토양과 날씨, 그리고 수확한 계절과 가공법에 따라 차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가격이 비싸다고 다 좋은 차가 아니고, 싸다고 다 나쁜 차가 아니다. 내 입에 맞고 내 위에 부담이 없는 차가 제일 좋은 차다. 차를 알고 나를 알아야 비로소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다.

Weixin Image_20240911123434.jpg 초록을 입에 머금고 바라보는 초록이 눈부시다.

한국에도 유명한 차밭이 곳곳에 있다. 이번 여름 방문한 하동에는 '세작'이라고 하는 녹차와 '잭살'이라고 하는 홍차가 꽤나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차밭에서 나오는지라 맛도 다 제각각이다. 브랜드와 이름만 보고 집어 들기보단 먼저 시음을 요청해 보라. 차를 중히 여기는 주인장이라면 흔쾌히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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