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다람쥐 엄마

부자 마음

by 엄민정 새벽소리

엄마는 태풍이 다녀가면 과수원에 가셨다. 매년 이맘 때면 찾아오는 손님이라 기억할 법도 한데 올해도 묻는다.

"어디서 오셨소?"

"이 양반이 또 이러시네. 나 몰라 나?"

대답하면서 이미 줍고 있는 손이 바쁘다. 밤새 지나간 폭풍우에 떨어진 흠집 나고 멍든 과일은 엄마 손을 거쳐 귀하게 박스에 담긴다. 이미 불룩해져 더 이상 담을 수 없음에도 계속 올려 담는 사과가 자꾸 떨어진다. 비닐 포대를 둘러 박스를 노끈으로 꽁꽁 묶는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우리 가족의 갈증을 해결하고 몸을 살찌우는 엄마의 오래된 방식이다. 썩거나 흠집 난 곳을 칼 모서리로 도려내고 껍질을 벗겨 뽀애진 사과 맛이 청량하다. 올해 사과 맛 좀 보겠다고 옆으로 와 앉으신 아빠에게 엄마는 과수원 사장의 형편없는 기억력에 대해 말한다. "내년에도 '어디서 오셨소?' 하겠지? ㅋㅋㅋㅋ"

그래도 그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덕분에 마음이 부자다.


고향집 읍내에는 오일장이 선다. 시골 인심으로 옆집에서 준 무, 앞집에서 준 대파가 진작부터 냉장고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는 운동을 핑계 삼아 나간 길에 장도 한 바퀴 돌고 오신다. 나의 엄마이자 우리 딸의 할머니인 이 여인은 어딜 나가면 절대 빈 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다. 오늘은 장에서 상인들이 알배추를 팔고 남기고 간 배추 겉잎과 전복 껍데기를 한 봉지 들고 오신다. 배추 겉잎은 한번 삶아 질긴 껍질이 벗겨진 뒤, 된장과 끓여 된장 지짐이 된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향의 맛에 밥 한 그릇이 부족하다.

전복 껍데기는 솔로 깨끗이 씻어 육수를 우린다. 껍데기에서 무슨 감칠맛이 나온다고 끓이는 것인지 아직도 의문이다. 내 잔소리에도 엄마는 뿌옇게 우러난 육수로 국수도 말아주시고, 아빠 소화를 돕는 죽도 끓인다. 두 손 넉넉히 들고 와 식탁이 풍성해졌다.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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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엄마의 행방을 알기 어렵다. 새벽 4시다. 자전거가 사라졌고, 엄마도 없다.

그 사이 동이 트고 아침 7시가 된다. 한여름 날씨에 겨울 파카를 두르고 땀복 바지를 입은 엄마가 전신이 땀에 절어 대문을 들어선다. 더운 옷을 벗어던지고 급하게 들어간 욕실에서 찬물로 체온을 식힌 다음에야 엄마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집 대문 옆으로 동태탕 집이 오픈했다. 이런 시골 구석에 누가 들어와서 장사를 하나 하고 궁금해서 들여다본다. 건물을 전체적으로 개조하고 꾸미는 모습이 제대로 하는 모양새다. 사장님은 생선 요식업 쪽에서 뼈대가 굵은 분이라 야무지게 장사를 잘하실 것 같은 인상이었다. 문제는 일손이다. 개업을 했는데 도울 일 손이 없다. 젊은이들은 진작부터 찾기 어렵고, 식당일을 할 수 있는 좀 억세고 강단 있는 직원이 필요했다. 올해 60대 중반의 우리 엄마가 '이건 내게 온 기회'라며 이력서를 냈고, 벌써 일 년째 사장 부부와 손발을 맞추고 있다.


점심 장사 시간에만 일을 봐주시니 오후 3시에 퇴근이다. 엄마는 퇴근 후 화장을 지우고 다시 땀복으로 갈아입는다.

밭의 옥수수를 거둬야 할 계절이다. 옥수수는 제 때 추수하지 않으면 금방 늙어버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다. 참외와 오이에 그늘을 드리우는 키 큰 옥수수를 낫으로 쳐서 꺾는다. 엄마의 가족을 먹이는 의지는 실로 대단하다. 40도에 가까운 기온에도 밭을 매고 잘 익은 옥수수와 토마토를 한 바구니 가져온다. 엄마의 열정은 모기의 날카로운 입도 뚫을 수 없다. 엄마가 우산 재질의 충전재가 들어있는 땀복을 입는 이유다.


여러 차례 엄마를 상하이에 초대를 했다. 아빠 밥을 걱정하는 것으로 시작된 핑계는 아빠가 괜찮다고 하시니 설득력을 잃는다. 이제 그 핑계는 동태탕집이 되었다.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사소하게 하는 것 아니다. 남의 장사에 들락날락하는 거 아니다.

갖다 대는 온갖 이유와 핑계에 딸에게 주는 교훈을 담아주려 막간을 이용한 설교가 시작된다.

손발 들고 혼자 상하이에 돌아왔다.


그간 게을러졌던 루틴을 다시 바짝 조여야 할 때다. 고향에선 엄마가 내 앞에 떡 버티고 계시니 얌전히 주는 밥만 먹었다. 여기에 돌아오니 내 앞에 바로 현실이다. 식구들 먹일 것을 두 손 가득히 사서 들고 온다. 그간 과일과 채소를 잘 못 챙겨 먹었을 남편을 생각해 과일을 씻고 나물을 무친다. 반찬 몇 가지를 정신없이 하다 보면 손에 묻은 참기름이 핸드크림이 된다. 엄마 손 냄새다.


하루 할 일을 오전에 다 해야 마음이 놓인다. 오후도 미래다. 미래가 평안하려면 미리미리 조금씩 애써야 한다. 엄마가 수십 년간 주워다 먹이고, 가져다 먹은 것들의 힘을 이제는 안다. 그 시절의 절약하는 습관이 엄마의 날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있다. 돈도, 건강도 다 저축해 두면 노년의 부(富)다.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음을 걱정하면서도 이미 몸소 보여주고 계시는 교훈이다.

"10년 후 딸이 한국에 들어와 살 때까지 엄마 아빠는 지금처럼 잘 유지하고 있을게."

작별 인사는 짧으나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님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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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잘 유지하고 있겠습니다.' 다짐하며 운동화 끈을 질끈 묶는다.

그 후로 나는 날다람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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