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를 일독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재독에서 보인다. 아니 왜, 처음 보는 것 같지? 일말의 기시감도 없어 의아하다. 스스로 무신론을 택하고 동성애자기도 한 저자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호모 사피엔스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신화 정도의 것으로 격하시킨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조목조목 들고 일어서는 소수의 목소리가 어지간한 어불성설보다 설득력이 있다.
책의 중반으로 가는 길에 흥미롭게 눈여겨보았던 부분이 있다.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인 성을 다루는 부분이었는데, 사회에 고질적으로 자리 잡은 성별과 서열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
남자가 되기는 세상 쉽다. X, Y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 여성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다. X염색체 한 쌍이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은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된다.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끊임없는 의례와 퍼포먼스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여성의 일도 끝나는 법이 없다. 문제는, 거의 모든 문화가 여성성보다 남성성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배경에 있을 법한 근력, 가부장제, 협력등의 관점으로 그 이유를 밝혀보려 하지만 본 챕터는 결국 알 수 없음으로 끝난다.
고대 중국의 갑골문 기록을 보더라도 아들을 낳는 것은 정한 것이며, 딸을 낳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현대 아테네와 고대 아테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속성은 행동과 욕망, 의상, 심지어 자세까지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당시 한 여성이 뭇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강간범은 그 여성 본인이 아닌 그녀의 아버지나 남자 형제에게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여성에게 남성 보호자가 없다면 그 여성은 누구나 강간해도 된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분주한 길거리에서 발견한 10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는 행위가 도둑질이 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간주했다.
성별과 서열의 연관성은 그 뿌리가 깊고도 깊다.
한국 연인들 사이에서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용어는 여성이 나이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남성이 나이가 많은 커플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용어조차 없다. 이런 연상연하 커플이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보인다. 그 중심에서 한창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
너라고 부를게
여성이 연하인 경우에 남성은 '오빠'소리를 당연하게 들으려 한다. 너라고 불렀다간 '방금 뭐라고 했냐'로 시작해 '내가 네 친구냐'로 끝나는 일장연설을 들어야 할 것이다. 동갑내기였음에도 '오빠'라고 불러줄 수 없냐던 옛 연인의 돼먹지 못한 남성 우월주의에 아직도 코웃음이 난다. 그런데 남성이 연하라면 '너라고 부를게'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이런 불공평이 있나.남성성을 어필하려고 꽉 안아주겠다고 하는 가수의 앳된 목소리가 더욱 애같이 느껴진다.
한동안 느끼하고 능청스러운 이미지로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개그맨이 있다. 그는 여성들이 간지럽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를 잘 캐치하여 손발을 제대로 오그라들게 했다. 오글 캐릭터를 구축한 그가 최근 결혼 소식을 가지고 티브이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본인의 정혼자를 존칭 어법으로 남들 앞에 드러내는 그의 말투와 격조에 눈이 갔다. 부부는 대등한 관계이다. 그의 고운 어휘 선택과 적절한 높임법이 녹아든 문장은 듣는 내내 귀를 흐뭇하게 했다. 그분의 결혼 생활이 순탄할 것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딸이 훗날 결혼식에 입장하는 모습을 문득 그려본다. 딸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잘 자랐을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키웠다. 아빠가 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는 퍼포먼스는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독립된 인격체 둘이 만나 이루어갈 가정이다. 식상한 결혼식 퍼포먼스에 은연중에라도 딸이 느낄 혼란과 격하감, 그리고 사위가 느낄 우월감이 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