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다름 아닌 은행 잔고가 적힌 통장이었다. 빚만은 없이 시작하자는 말을 기억한 건지 결혼 전 마이너스 통장이며 카드 빚이며 다 정리하고 건네준 통장이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열어본다. 안도라고 해야 할지 한숨이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잔액: 0원
우리는 0원으로 시작했다.
월세와 생활비를 제하고도 조금씩 쌓여가는 통장의 숫자들을 보며 재미가 생기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속도가 붙지 않아 먼산만 바라보는 날도 있었다. 상하이 버스 노선을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우린 대중교통 애호자가 되었고, 쉬는 날이면 유모차를 지하철에 태워 공원에 놀러 갔다. 같이 어울리던 엄마들이 택시를 타고 다니면 나는 유모차를 트렁크에 싣기 위해 접었다 폈다 하기 번거롭다는 핑계를 만들어 지하철을 타고 갔다.
지하철역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에스컬레이터라는 난관을 마주친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유모차 앞바퀴를 고정하고 뒷바퀴를 들어 무게중심을 앞쪽으로 옮긴다. 내려갈 때는 그 반대다. 뭐든 하면 요령이 생긴다.
그 당시 남편은 자전거라도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교통비도 아끼고 운동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다 중고 자전거를 발견해 저렴하게 구입했다.
그 후 남편은 차가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곤 우리는 중고차를 샀다.
그 후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고 산더미 같은 대출을 끼고 집을 샀다.
우리는 지금, 좀 더 큰 집으로 옮기고 싶어 한다. 희망사항이지만.
신혼 초에 남편과 나는 인도로 신혼여행을 길게 떠났다. 일절의 계획도 없이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젊음 하나만 믿고 떠난 여행길은 첫날부터 소박했다. 기름기 한 방울 없는 퍽퍽한 고기같이 실속만 중요시한 숙소가 그랬다. 호텔이라 쓰고 여인숙이라고 불러도 되는 곳이었다. 밤늦게 들어간 터라 잠만 자고 나올 거라며 예산을 크게 잡지 않은 탓도 있었다. 범죄 영화에서 자주 볼 법한 골목 으슥한 곳의 숙소. 카드키도 아니고 비밀번호 키도 아닌, 오랜만의 실물 열쇠를 받아 들고 올라가는 계단에서 인도의 향이 났다. 그 향은 커리나 향신료 향이 아닌 길거리 곳곳에서 신에게 올리는 상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였다. 이국적인 느낌의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 방에 도착해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방에서도 그 향은 이어진다. 방은 익숙하면서 어색했다. 캄캄하고도 적막했다.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욕실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한국에서 김장철 배추 절일 때 쓰는 빨갛고 깊은 다라이 안에는 물이 가득했다. 그 위엔 익숙한 바가지가 떠있었다. 우리의 결혼 첫날밤이 그랬다. 이틀, 사흘, 나흘… 그 이후의 숙소가 다 비슷했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여행이라고.
여행이라 생각한 삶에는 욕심이 없었다. 내 몸을 맞추고, 받아들이니 이곳이 천국이고, 내가 세상 부자다. 창문이 없어 빛이 들어올 틈도 없었지만 어둠이 들어올 틈도 없었다. 네가 나의 빛이고, 내가 너의 빛이 되어주면 족하다.
삶이라고 생각한 곳에 욕심이 끝이 없다. 욕심이 틈타지 않고 내면의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문에 방충망을 달아놓는다. 구멍이 나면 글루건으로 때운다. 욕심은 들어오지 못하고 기쁨은 나가지 못하게 꼭꼭 단도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