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이 싫어서 독서가 지독히도 싫었다. 학창 시절의 독후감은 시간에 쫓겨 음미하지 못하고 바로 대장으로 직행한 형편없는 끼니였다.
여기, 독후감 숙제를 도입부터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고민하는 중1의 내가 있다. 책을 읽었으나 의미까지는 읽지 못했으니 둥둥 떠다니는 쌀알 같은 생각들을 가래떡으로 만들어 뽑는 작업이 고되고 어려웠다. 그 순간 눈에 번쩍 띈 것은 먼지에 뒤덮인 채 말없이 책장에 웅크리고 있던 독후감 수상집이었는데, 적시적소에 유용한 참고서가 될 줄은 기대도 없었다. 냄비 받침으로 썼는지 표지는 군데군데 젖은 흔적과 벗겨진 흔적, 책머리와 책배에도 시간의 흔적이 누렇게 내려앉아있다. 도입 부분의 형식만 참고할 생각으로 원고지와 책을 나란히 놓았을 뿐인데, 무의식은 한순간 나를 필사로 이끌더니 표절의 목적지로 데리고 갔다. 내 의견과 엇갈리는 수상인의 의견에 순응하 것은 필연적이었다. 철저한 복붙(복사와 붙여 넣기)으로 새 명찰을 달고 다시 태어난 글은 반장 손에 끌려 선생님 앞에 도착하였다.
교무실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자 담임 선생님이기도 한 그분의 예리한 눈이 이 표절작을 잡아냈음이 분명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저음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나는 떨고 있었다.
예상치 않게 마주친 것은 선생님의 칭찬 세례였다. 선생님은 나의 독후감을 전교 독후감 발표회에 내보낼 계획을 말씀하셨다. 내 이름을 달고 어리둥절한 독후감 '조나단 리빙스턴의 <갈매기의 꿈>을 읽고서'는 그렇게 강당에 올랐다. 주인공 스티븐 시갈의 '시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꼭두각시처럼 남의 글을 내 글처럼 읽었다. 시갈이 무어냐고 누군가 물어올까 봐 긴장했지만 그 시절 아이들은 다행히 독후감 발표 따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시갈이 바다갈매기라는 뜻의 seagal이었다는 것은 독후감 복붙 사건이 나를 지나간 한참 후였다.
모든 교육의 바탕에 독서가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내가 알았더라면 독서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의 독서량과 교과 학습의 상관관계를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서술과 논술, 독해와 이해를 위해 아이의 독서력 향상은 교육의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티브이 없는 집을 적극적으로 모방하며 티브이는 나쁜 것, 책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이 우리 가정을 오래 지배했다.
독서와 쓰기는 한 몸. 읽으니 쓸 기회가 눈에 보였다.
규모 있는 독후감 대회에 지원했다. 나는 일반부에, 아이는 초등부에.
선정도서 5권 중 한 권을 선택하여 쓰는 것이었는데, 올해 나의 독서 폭발 시점과 맞물려 이번 대회는 내게 큰 의미가 되었다. 7월 내에 지원하기 위해 6월에 초고를 마치고 7월 한 달을 퇴고에 할애했다. 선정 도서 중, 임솔아 작가의 <최고의 삶>은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떠올리게 해서 그냥 두루마리를 풀어놓는 일처럼 느껴졌다. 주제를 잡고 어휘 하나, 조사 하나를 신중하게 다듬으며 퇴고했다.
한편, 지원 마지막 날짜까지 쓰기를 미루고 미루던 아이는 7월 30일에 서둘러 쓰고 31일에 지원했다. 쯧쯧쯧 혀를 차며 아이의 준비성 없음을 탓했다.
9월 27일 발표일 아침.
10시경에 날 거라고 예상한 발표가 아직 조용하다. 지금껏 기다렸지만 오늘의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참을성 없는 마음은 전화를 들어 다이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의 지루한 목소리는 나와 같은 전화를 수도 없이 받은 듯했다. 오후 1시라는 퉁명한 목소리에도 감사했다.
수상자 명단은 일반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의 순서로 스크롤을 내리며 볼 수 있었다. 작년보다 많아진 지원자 틈에서도 열심히 썼다는 자부심으로 기대와 욕심을 버리기 쉽지 않았다. 명단을 클릭하고 천천히 내 이름을 찾는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나의 비수상 소식이 확실해져 갔다. 내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책과 내가 하나로 만난 경험을 녹여낸 나의 소감이 심사위원에게도 울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실망과 허탈함이 입에서 바람과 함께 빠져나왔다.
마우스 커서가 일반부 섹션을 지나가며 힘 빠진 손가락은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익숙한 휴대폰 뒷자리와 함께 익숙한 이름이 시선을 잡았다. 딸이었다. 지원 이메일을 전송해 주며 딸을 향해 혀를 찬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날 방과 후 본인의 수상 소식을 들은 딸은 엄마의 비수상 소식 때문에 맘껏 기뻐하지도 않았다.
너무 잘하려고 해서일까.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간 건 아닐까. 무거운 주제를 더 무겁게 풀어서일까.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볍게 쓴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긴 한가. 무한한 생각이 꼬리를 잡고 또 잡았다. 아이의 수상 소식에 나도 뛸 듯이 기뻤지만, 그와 별개로 이건 내가 내 마음과 해결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질문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과연 남의 인정을 위해 글을 쓰는가.
낙방할 때마다 흔들리는 자존감을 감당해야 하는 이 땅의 모든 문인들의 흔하고 숱한 일화 중 하나였을 뿐이다. 수백 번의 투고에도 출판과 등단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이들의 힘없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다.
그러고 보면 브런치는 참 귀한 곳이다. 완벽한 사람이나 완벽한 글만 보려 하지 않고 쓰는 이의 말을 먼저 귀 기울여 들어주니까. 쓰는 행위의 무용함을 은연중 반박하고 있으니까.쓰기의 쓸모를 응원하니까.
낙방에 낙심 않고 쓰는 행위를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이 마침내 수상 소식처럼 찾아왔다.
고흐가 되어본 3시간
이러는 사이,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잔잔한 음악의 파동에도 잠시 귀를 맡길 수도 있었다.
Vincent....
부드러운 멜로디에 빠져들었지만, 가사의 의미에 더 깊숙이 침잠했다.
짧았던 인생 속에서 그의 농축된 감정들.
분노, 우울, 공허, 무기력을 작품을 통해 위로하고 치유하려 했던 그의 심정.
당시에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의 뜻이 재평가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말하고자 한 말이 허공을 떠돌다 이제야 우리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도 하늘을 한 꺼풀 벗겨내면 유난히 별이 빛났을 밤이었다.
음악을 스피커에 연결했다. 서랍 속에 포장지채로 들어있던 오일파스텔을 꺼내 천공의 무한한 별들을 상상했다. 화려한 은하수와 별 빛 안의 어둠과 희망을 보며 별 속에 빨려 들어가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마음을 정확히는 알 수는 없지만 한 터치 한 터치 따라가다 보니 만날 수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중심과 세상의 의미.
열렬히 부르짖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내 귓가에 닿았다. 글로, 그림으로, 예술로 승화된 목소리의 울림에 세상이 전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