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과 우산과 손가락

오늘도 전장(戰場)에 나아가는 당신을 보며

by 엄민정 새벽소리

"Yes, yes, Ok!

Let me check it out!"


듣는 이도 없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안방 문턱을 넘는다. 다된 밥을 휘휘 젓던 손은 주걱을 내려놓고 잽싸게 방으로 간다. 방 안의 공기는 의외로 평온했다. 허공을 향해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공중을 배회하고 있다. 모처럼만의 늦잠이라 푹 잤으면 했지만 보아하니 꿈속에서 이미 업무 중이다. 워커홀릭은 낮에도 밤에도 쉼이 없구나.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용히 문을 닫는다. 중대한 회의를 방해할 순 없으니까.

새벽같이 출근하여 늦은 밤 퇴근하는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살아온 시간이 십여 년이다. 이제는 수면까지 위협하나 싶어 걱정이 깊어진다.


회식이 있어 그의 귀가가 늦어졌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말투와 발음의 부정확함을 보니 이미 만취가 확실하다. 보스와 마시는 자리는 그래서 어렵다.

"제 주량은 맥주 목까지 입니다만..."

주량을 계산하며 느긋하게 마실 분위기가 아니었나 보다. 비척비척 걸어 들어오는 그를 보며 이해의 말 한마디보다 비난의 한마디가 먼저 입 밖으로 내달음친다. 양말만 벗고 침대로 쓰러지다시피 기어들어온 남편에게 유해한 냄새가 풍겼다. 남편을 이렇게 만든 그 보스란 사람을 씩씩대며 수도 없이 욕했다.

자는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아했다. 입 안에서 굴러다니던 욕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시 뱃속으로 삼켜졌다.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 은유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살면 족해."

근래 걱정이 많아진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남편의 언어는 무겁고 침착했다. 외벌이 남편의 고충을 이해하려는 모습보다 불평거리만 찾아다니던 평소의 내 모습이 떠올라 한심했다.

미안하고 고마운 복합적인 감정으로 잠이 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휴양림을 예약해서 여름휴가동안 머물렀다. 빽빽하고 키 큰 나무가 만들어준 자연 캐노피는 우리의 쉼터와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노곤한 영육의 피로를 벗어놓고 숲의 청명한 숨결을 뱃속 깊은 곳부터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숲의 심장부까지 나있는 데크를 맨발로 걸으며 처음 보는 큼직한 민달팽이를 관찰하고,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새벽의 이슬방울에 웃었다. 시원하게 울어재끼는 매미와 땅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폭포수의 함성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소리를 찾아 도착한 폭포와 계곡은 누구의 흔적도 없는 순수한 자연이었다. 우리는 깊을수록 짙어지는 차가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로 물을 뿌리며 즐거워하는 부녀를 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돌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넘어질까 조심하며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숲 속의 집 사이에 작고 아담한 커피숍이 보였다. 시작 신호도 없었지만 뜀박질을 시작했다.

빗속 달리기에는 희망과 포기가 교차한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은 순간부터 젖을세라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다. 손을 머리에 얹어 머리카락과 시야를 보호하기도 한다. 남편 허리춤의 우비는 자연스레 나와 은유의 차지가 된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점점 그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 찌걱찌걱하는 고무 샌들의 소리는 경쾌한 리듬이 되고,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된다. 박자를 찾아가며 발맞추어 뛰는 사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든 비에 머리카락이 관자놀이에 붙고 눈두덩이에 붙는다. 저항하던 비를 받아들이 시작하니 달리던 발이 서서히 느려진다. 뛰어서 출발했지만 느릿느릿하게 우리는 고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삽시간에 몰아치던 비는 엄격하리만큼 냉정하게 그쳤다. 잠시 비를 피해 휴식하던 까마귀 한 마리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약이 바짝 올랐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올해는 유난히 소나기가 잦다며 하나같이 중얼거리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생각난듯한 남편의 표정에서 불안을 읽었다. 그는 잠시 숙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깨에 둘러매는 납작한 가방을 가지고 돌아온 남편이 카페 테이블에 랩탑을 펼치고 인터넷을 연결한다.

"비도 그쳤는데 은유랑 한 바퀴 돌다 오면 어때?"

"아니, 안 나갈 건데. 우리 다리 아파."

"밖에 비 그쳤어. 아이스크림 먹고 와."

"응 이따가."

의자를 꺼내 엉덩이와 등을 미끄러지듯 걸터앉은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이내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내 보스와의 영상 통화가 시작된다.

'휴가 중 회의를 한다고?'

의아한 마음에 그의 음성에 청각을 집중했다. 말투와 억양이 꼭 군인을 닮았다. 남편은 긴장했고, 자꾸 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게 들키기도 했다. 은유를 앞세워 카페를 나갔다.


30분의 시간이 흐르고 편안해진 얼굴의 남편이 카페문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바위 위에 앉아있던 엉덩이를 털며 그를 맞았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은유는 하늘의 무지개에 온정신을 빼앗긴 상태다.

"잘했어? 무슨 업무평가를 휴가에 잡아?"

"그러게. 다 잘 끝났어. 근데 승진 이야기는 없네?!"

휴가에도 평가를 앞두고 복잡했을 남편의 심정에 마음이 짠했다. 회사에서의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 준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시간. 하루의 하이라이트다.

연애 때는 더워도 잘 잡아주던 손은 이제 새끼손가락만 허락한다. 무엇이면 어떠냐. 난 그거라도 좋다.

저 멀리 녹색 신호등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횡단보도를 슬쩍 가리키고는 남편이 먼저 뛴다. 뒤이어 나도 뛴다. 안전하게 길을 건넜지만 이상하게 이쯤되면 심술이 난다.

"왜 날 두고 먼저 뛴 거야?"

"가장이 방향을 제시하면 같이 뛰는 거야. 군말 없이!"




오늘도 당신의 무사 귀환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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