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에 와인은 못 참지

한잔은 정말 한잔

by 엄민정 새벽소리

해가 짧아지니 어둠이 길어졌다. 5시 32분, 일몰 시간에 맞춰 운전 중 GPS가 검은 바탕의 야간 모드로 전환했다. 앞차의 브레이크 등에 차 안이 붉어졌다. 빗길 정체 속 4차선 도로가 온통 붉었다. 화면이 가리키는 노선은 붉다 못해 검붉었다. 그 아래에 번쩍하고 나타난 푸른색 팝업창에 눈이 부셨다.

전방에 사고가 발생했나요?
(yes/no 선택 버튼)

"네가 알지 내가 아니."

"고객님의 의견에 감사합니다."


도로 공사가 아직이다. 차선을 검은 지우개로 대충 문질러 놓은 흔적이 조악하다. 지운 선 옆으로 다시 희게 그어놓은 선에 시야가 굉장히 산만하다. 운전자는 전방을 보는데도 차량은 비틀댄다. 화면에 차선이 초록으로 변하면서 정체가 서서히 풀린다. 뒤로 한 칸 제쳤던 운전석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려다 두 칸 앞으로 나와버렸다. 되돌릴 새 없이 앞차에 따라 나도 출발한다. 허리가 곧추선 채 연달아 녹색 신호를 받는다.


차 문틈으로 밀려드는 찬 바람이 날카롭다. 종일 내린 비로 습기까지 품은 냉기는 잊었던 겨울을 떠올리게 했다. 입으로 나가는 뜨신 숨소리가 쉭쉭거렸다.


아침에 시켜둔 배달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다소곳이 몸을 오므리고 있었다.

과일치즈, 훈제치즈, 고다치즈, 브라운치즈, 브리치즈.

어젯밤 다시 들춰본 김민철 작가님의 치즈 책이 원인이었다. 작가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지독한 공감으로 체머리를 흔들었다. 치즈가 좋아 프랑스에 가 온갖 치즈를 섭렵하며 책까지 낸 그녀의 열정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 못해 어젯밤 충동적으로 주문을 눌렀다. 그걸 여태껏 잊고 있다가 저녁에서야 문 앞에서 의아하게 마주친 것이다.


먼저께 남편이 회식자리에서 남은 와인 두 병을 집에 가져다 놓았다. 마시지는 않아도 좋은 건지 확인은 해봐야 했다. 하나는 빨간 밀랍 뚜껑에 화려한 라벨 디자인이 눈에 띄었는데, 가슴팍에 금색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달고 있었다. 와인 대회에서 금상 받았다는 표시라는데 마셔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다른 한 병은 수수하고 단정한 라벨에 비교적 클래식한 병이었다. 2015년 빈티지의 보르도 와인. 재빨리 구글로 로버트 파커의 빈티지 리스트를 연다. 그 해 보르도 빈티지의 평이 탁월했다. 이거 물건이네!

Robert Parker vintage chart

고민했다. 투병과 치료 후 한 잔도, 아니 한 모금도 거부했던 술 아닌가.

처음이 무섭지 두 번은 쉬울 수 있었다. 하여,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빠져들면 빠져나올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와인 아닌가.


코르크의 숨구멍에 와인이 달라붙고 굳고 엉기고 한 시간이 길었던 듯하다. 병 주둥이가 마개를 쉽게 뱉지 않는다.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사람모양 오프너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맥가이버 칼 옆구리의 스크루를 잡고 덤볐다. 땀을 닦고 닦아도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발로 병을 고정하고 은근한 힘으로 지속적으로 잡아당겼다. 한참 버티던 코르크는 병입구와 접촉면 마찰을 타협하며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개가 반쯤 나왔을 때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10년간 갇혀있던 향이 순간적으로 분출되어 사라질까 후각을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마개의 뽕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와인의 존재감에 코끝이 찡해졌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반가움에 찡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곧바로 잔에 따라 벽에 부딪히며 만드는 작은 파도 속에 숨을 섞었다.


조심히 가져댄 첫 모금에 잠시 멈추었다. 우아하고 풍성한 맛을 기대했을까. 그 개성 있는 떫고 신 맛에 발끝이 찌릿했다.

흘러든 와인에 무방비로 벌어진 입술.

입 안 곳곳을 할퀴는 성깔 있고 단단한 맛.

혀뿌리에 기침 같은 칼칼함을 남긴 채 의뭉하게 몸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제야 혀의 맛봉오리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첫 모금에 깨진 장벽은 두 번, 그리고 세 번 무심하게 나를 건드렸다.

오랜만인데 어색하지 않아 어색했다.


술은 마시면 는다고 하던데, 안 마시니 줄은 걸까. 와인잔의 목을 손가락 사이에 걸고 손바닥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을 몇 방울씩 여러 번 나눠 마셨다. '오랜만이야' 하고 맞아주는 그 한 잔의 인사가 좋았다. 더 마신다고 더 좋아질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만큼, 딱 이 만큼이 좋았다.


금욕의 빗장이 풀린 것 같아 자유로웠고, 그 빗장을 내가 다시 꼽을 수 있어 좋았다. '손만 잡고 잘게' 하는 코미디 각본에 진실로 손만 잡으니 애욕적이지 않은 러브 스토리가 되어 흐뭇했다. 그 마법 같은 방탈출 게임을 하지 않고도 출구를 알아내서 좋았다. 더 마셔도 별거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좋았다.

중요한 건 술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와인과 절제력을 양손에 들고 있으니 치즈도 여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운로드.jpg 뱅쇼

오렌지, 레몬, 계피, 정향을 주문했다. 환절기에 감기를 달고 사는 남편을 위한 뱅쇼*다. 예전에는 저렴한 와인을 사용했지만, 어젯밤에 남은 거의 온전하고도 좋은 한 병을 아낌없이 부어 넣으니 사치 같아 즐겁다.






*뱅쇼(vin chaud): 프랑스어로 '따뜻한(chaud) 포도주(vin)'라는 뜻으로, 포도주에 여러 과일계피를 비롯한 향신료를 넣고 끓여 만든 음료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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