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해인을 좋아한다. 그의 맑은 미소가 좋고 특별히 그의 선한 눈빛 속의 강인함을 애정한다.
그의 신작 소식을 들으면 손을 꼽으며 기다리고 본방을 위해 대기한다. 그런 그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후로 나를 기대하게 했던 '엄마친구아들'이 현재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며 방영 중에 있다. 소꿉친구가 연인이 되는 식상한 플롯에도 그의 연기와 상대 여배우와의 자연스러운 꽁냥함을 기대하며, 더불어 상대 여배우 캐스팅에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재미로 매주의 에피소드에 빠져들었다.
알콩달콩한 두 주인공의 살아온 환경, 배경, 교육, 현재 등을 시간 순서와 관계없이 들락날락 이야기를 배치한 제작진의 의도한 물결에 파도를 타며, 드라마 중반에 다다를 동안 쌓인 궁금증은 계속 드라마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8화 즈음이었을까. 끊어진 다리 같던 스토리가 하나씩 이어지기 시작하는데, 여주인공이 큰 병으로 아팠던 기억의 장면이 과거의 필터가 씐 채 화면에 나왔다. 병원 장면을 시작으로 장르는 로맨스에서 슬픈 멜로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해인이라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그 후로 이 드라마를 끊어냈다.
내면의 소리가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내게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귀띔을 주었다.
정해인을 선택한 건 내게 기분 좋은 감정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퍼즐 맞추기와 같은 스토리에는 여주인공의 암투병 과거가 숨어있었다. 어렵게 찾은 병원에서 젊은 그녀의 모습과 의료진의 태도, 그리고 주변인들의 반응이 익숙했다.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당시의 심정과 감정이 되살아나 그녀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만.
그만 봐야겠다.
여성 주기에 맞춰 허리라도 쿡쿡 쑤시기라도 하면 그 원인을 암에서 찾고 있는 머릿속 회로가 생겨났다. 이어지는 심장 박동수 증가에 심호흡을 연거푸 내리 쉬며 평정을 찾기에 바빴다. 확대해석하는 습관, 그리고 태생적으로 기우는 부정적 생각이 여전히 나를 자주 휩쓸고 갔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어렵다. 6인용 병실에서 내 나이가 제일 어렸다. 환자들 사이에도 나는 측은한 대상이 되었다.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은 젊은 한국인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동정심을 기반한 친절함이었다. 가련하게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어색해서 자주 숨고 싶었다. 누군가의 친절한 배려에 속상했지만, 누군가의 배려 없음에도 똑같이 반응했다.
그 지난한 시간도 이젠 지났다.
암, 재발, 전이와 같은 단어들에 부여되는 불필요한 무게를 서서히 내려놓기로 했다. 먼저 지금 내 감정이 내게 유익한지 나 자신에게 거듭 질문했다. 그런 집착과 불안은 대개 내가 오늘 루틴을 하지 않고 미루고 있을 때 찾아왔다. 냉정하게 생각의 끈을 끊어내고 밖으로 나간다. 의식적인 선택은 건강한 정신을 선택하게 하고, 기분이 좋아지며, 그 선택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했다.
실로 나는 그 후 더 건강해지고 있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인생의 전환점은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난 후에 찾아왔다. 먼 훗날의 꿈을 막연하게 그리는 삶에서 지금 당장 발밑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으로 미래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하루의 힘을 믿으며 나의 생각을 믿으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을 믿는다.
이 빛나는 가을이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산책길을 나선다. 가을이 주는 청명한 숨결을 폐부 깊숙이 채운다. 끝없이 사진을 찍고 그 황홀한 석양에 발을 동동 구른다.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계화꽃향이 닫힌 공간의 샴푸 향처럼 공기에 넓게 퍼져있다. 잔잔한 잎이 떨어진 바닥이 내게 금색 카펫을 깔아준다. 이 순간 비상사태처럼 느껴지던 많은 문제들은 하찮은 일이 된다.
감정을 선택하는 것은 나다.과거의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재구성할 수는 있다. 자주 머리를 비우고 건강한 정신을 되찾아 오는 노력을 한다. 생각의 덩어리가 커지지 않게 매 순간 의식한다. 이성과 균형감을 가지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감정의 선택권을 내 손아귀로 다시 가지고 온다.